목회칼럼(권순혁목사) 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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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권순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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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15.2026 하나님의 나라는 작고 연약한 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작고 연약한 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주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강함, 능력, 영향력을 통해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작은 존재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는 화려한 궁전이나 강력한 군사력 속에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오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음”과 “낮아짐”의 길이었고, 그 길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일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힘이나 공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연약한 자를 통해 일하실 때, 영광은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또한 연약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충분한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형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았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미미해 보였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이미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순종에 머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작게 여기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런 우리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통로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 또한 크기나 외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가에 의해 정의됩니다. 작은 섬김, 보이지 않는 헌신, 묵묵한 기도가 모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작고 연약한 자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크고 놀라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작음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자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이루어 가기 위한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줄 수 있는 질서와 평안을 누리기 위한 여정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우리를 무질서하게 하고, 파괴합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계속 하여 샬롬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작은 실천들을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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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08.2026 십자가의 길, 기쁨의 길, 영광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청년 때에 신학교를 가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주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놓겠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왜 그런 고백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실제가 되어보니 그때 그런 고백을 안 했다면 이 길을 안 걷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요즘 마태복음의 말씀들을 새벽마다 전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절대로 고난의 길이나 슬픔의 길이 아니라 기쁨의 길이고,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요 12:23).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의 순간은 사람들이 환호하던 예루살렘 입성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가장 비참해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가장 찬란한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고난 자체를 즐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고난 당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너머에 있는 기쁨을 분명히 바라보셨습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과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기쁨이었고, 죄로 묶여 있던 사람들이 자유케 되는 기쁨이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십자가의 길은 종종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양보해야 하고, 내려놓아야 하며, 이해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헛된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기쁨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이죠.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갈 때, 우리의 영혼은 쉼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죽음으로 보였던 자리가 부활의 문이 되었고, 패배처럼 보였던 순간이 승리의 선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길은 어둠으로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듯,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고 있는 작은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을 슬픔의 상징으로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언제나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빛이 오늘 우리의 발걸음을 밝히 비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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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Feb 01.2026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 종종 능력과 승리, 회복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애통함은 하나님 나라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애통은 연약함의 표시 같고, 실패의 흔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전혀 다른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단순히 슬픔을 위로받는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방식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나 완전한 자에게 먼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울 수밖에 없는 자에게 다가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단순한 감정의 슬픔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죄와 깨어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며,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며 아파하는 영적 반응입니다. 애통은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서 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종종 애통을 숨기려 합니다. 신앙인답게 괜찮은 모습으로 살아가려 하고,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억누르고 현실을 외면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깊이를 경험하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실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애통하신 분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눈물과 함께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위로는 단순한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네 곁에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물을 없애기 전에, 먼저 그 눈물 곁에 머무르십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애통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아직 마음이 굳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애통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애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깊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마음이 무겁고, 세상과 자신을 생각할수록 눈물이 나십니까? 그렇다면 그 자리를 실패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자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애통하는 자에게 다가오셔서, 위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함께 있어 주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용기내라고 말씀해 주시고, 박수쳐 주십니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우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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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
    아름다운교회 Jan 25.2026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위선적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시대에 뒤처졌다고 평가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를 자신들의 삶과는 무관한, 종교적인 공간으로만 인식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선 앞에서 교회는 때로 억울함을 느끼고, 때로는 방어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보다, 그 평가 속에 담긴 ‘기대’를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은 교회에 완전함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함을 기대합니다. 말과 삶이 다르지 않기를, 높은 기준을 말하기보다 그 기준 아래에서 함께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도덕적 우월감의 자리에 서기보다, 상처 입은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와 함께 울고 함께 고민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를 향한 비판 속에는 여전히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주목하는 지점은 주일 예배의 화려함이나 건물의 크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가 교회의 이미지를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며, 교회의 평판은 강단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형성됩니다. 특히 세상은 교회가 고통받는 이웃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유심히 지켜봅니다. 약자의 편에 서는지,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와 사랑을 선택하는지를 바라봅니다. 교회가 세상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은 세상과 싸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이 쉽게 포기해 버린 가치를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라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의 모든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복음 때문에 오해를 받고, 때로는 진리 때문에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가 사랑 때문에, 섬김 때문에, 겸손 때문에 비판받는 일은 줄어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이 교회를 향해 품는 최소한의 기대는 ‘말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시선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박수를 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의 말과 행동이 복음을 가리지 않도록,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삶의 증거입니다. 그 기대 앞에서 교회는 오늘도 질문받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삶 속에서 어떤 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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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
    아름다운교회 Jan 18.2026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함께 찬양하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배우며, 서로를 격려합니다. 교회는 안전한 피난처이자, 신앙을 회복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교회 안에서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당 안에서만 마음이 뜨겁고 사랑이 느껴진다면, 우리 믿음은 과연 세상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듯이, 우리도 교회 밖으로 나와 세상 속에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골목과 광장, 집과 시장으로 흩어져 복음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도 일상 속 작은 자리에서부터 복음을 살아내야 합니다. 작은 친절, 진심 어린 관심,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길입니다.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 교회는 겉으로는 건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정돈되어 있고, 프로그램이 풍성하며, 서로의 관계가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따뜻함이 교회 안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은 복음의 목적을 잃은 따뜻함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열매는 교회 문을 나서서 세상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때로 무겁고, 복잡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단순히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작은 손길이라도 내밀어 주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삶입니다. 교회 문을 나서기 전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내 삶 속에서, 나의 말과 행동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가? 친구, 이웃, 직장 동료, 혹은 가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 배운 사랑과 섬김이 일상의 자리에서 실천되고 있는가? 작은 관심과 사랑으로 시작되는 변화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됩니다. 한 사람의 진심 어린 배려가, 한 번의 친절한 말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발걸음을 통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조금씩 펼쳐지길 기도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 세상 속으로 흘러가는 사랑,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입니다. “하나님 나라: ON”의 사명은 계속해서 우리를 통해 지속되어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하나님 나라를 자꾸만 OFF 시키려 하지만 성령으로 무장한 성도의 힘은 그들의 힘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성실하게 이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침투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세상으로 우리 함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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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
    아름다운교회 Jan 11.2026 하나님 나라는 섬김으로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힘과 권위로 세워지는 나라로 생각합니다. 더 큰 영향력과 더 많은 성취, 눈에 보이는 성과를 통해 확장되는 나라라고 여기는 것이죠. 세상은 위에 서는 것을 성공이라 말하고, 더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을 능력이라 평가합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기준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배와 통제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을 통해 이 땅에 임하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씻는 일은 가장 낮은 종의 역할이었고, 누구도 자원하려 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더 위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사랑으로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섬김은 종종 손해처럼 보입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도 결과가 바로 보이지 않고, 때로는 오해를 받거나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김 앞에서 쉽게 주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크기를 섬김으로 판단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와 정반대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섬김은 마치 땅속에 묻힌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흙 속에 묻힐 때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자체로는 작고 연약하며,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씨앗이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생명이 시작됩니다. 섬김도 이와 같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흘린 땀과 눈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헌신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즉시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섬김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창한 선언이나 대단한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세워지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작은 손길, 교회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섬김, 세상 속에서 약자를 향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을 통해 확장됩니다. 이런 섬김을 통해 사람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향기를 맡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실천하는 작은 섬김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미래의 나라가 아니라, 섬김을 선택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섬김이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갑니다. 우리 교회가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 실현해 나가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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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04.2026 하나님 나라: ON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그것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흔히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교회 안에서만 경험하는 영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훨씬 더 넓고, 현재적이며,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이 땅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라기보다 통치이며, 개념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곳, 그리고 그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리,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일터에서 정직과 성실을 선택하는 순간 속에서, 갈등의 현장에서 보복 대신 용서를 택하는 결단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드러납니다. 세상의 방식이 힘과 경쟁, 이익을 기준으로 움직일 때, 하나님 나라는 섬김과 사랑, 자기 비움으로 확장됩니다. 이는 세상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바로 그 역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완벽한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돌아오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그분의 나라를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듯, 하나님 나라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라갑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알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것이지만 언젠가 그것이 자라 무성한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에게 필요를 제공하는 쉼터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이 아무리 적게 반죽에 들어간다 하여도 그것이 전체를 부풀리게 만든다고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점점 자라나 세상에 나타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불안과 혼란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안정과 확실한 답을 찾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 공허해집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상황을 지워버리는 희망이 아니라, 상황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평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더 많은 종교적 활동을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친절, 묵묵한 순종,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신실함이 모여 하나님 나라의 풍경을 이룹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살아갈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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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8.2025 마지막에 대한 짧은 생각
    우리는 대개 ‘마지막’을 잘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오늘이 반복될 것처럼, 내일도 당연히 올 것처럼 여기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돌아보면, 언제나 마음을 가장 깊이 움직였던 장면은 ‘마지막’이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 인사, 마지막 말, 마지막 선택. 그 순간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가볍게 말하지 못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마지막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평소에는 사소하게 여겼던 것들이 마지막 앞에서는 선명해집니다. 체면이나 계산보다 진심이 앞서고, 효율보다 사랑이 먼저 나옵니다.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본질에 다가갑니다. 그래서 마지막은 두렵지만, 동시에 정직하게 됩니다. 신앙의 자리에서도 마지막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마지막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때, 마지막 심판. 이는 공포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을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을 허투루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선택 하나가 영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죠. 예수님의 삶 또한 ‘마지막’을 향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던 그 길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배신자에게도 떡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이었고,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마지막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합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며, 관계도 책임도 쉽게 끊어냅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는 현재 또한 가볍게 만듭니다. 마지막이 사라질수록, 삶은 깊이를 잃게 되는 법이죠.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라는 말은 극단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따뜻하게, 더 진실하게, 더 책임 있게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예배라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까요.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라면 우리는 어떤 말을 남길까요.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의 태도를 바꿉니다. 마지막을 기억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마지막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는 자리에서 별이 떠오르듯, 끝이라고 여긴 곳에서 하나님은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두려워하기보다, 마지막을 통해 오늘을 새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충만한 오늘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곧 2025년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마지막 앞에서 후회도 아쉬움도 있지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026년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지난 시간보다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좀 더 정직한 모습으로, 좀 더 서로를 사랑하면서, 좀 더 본질을 향하여 가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환경이나 상황의 새로움이 아닌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의 새로움으로 시작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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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Dec 21.2025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들려온 소식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울림은 깊고도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큰 별빛이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말구유 위에 머물렀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가지고 왕이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왜 이땅에 오셨는지를 알고 있는 듯 각각의 의미를 담아 예물을 드렸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소식,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희망의 소식이었습니다. 큰 기쁨이라는 것은 상황이 바뀐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큰 기쁨은 삶이 여전히 버겁고, 세상이 여전히 불완전할 때 찾아왔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항상 더 또렷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좋은 소식이 아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누가는 외쳤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부재를 약속해서가 아니라 문제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을 소망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은 화려한 무대가 아닌 평범한 일상으로 전해졌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조용한 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의 귀에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자랑이 아니라 나눔이 되었고, 소유가 아니라 관계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쥐는 힘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기 위해 내어주는 손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온 인류에 전해진 소식, 차별없이 들려온 소식, 가장 낮은 곳에까지 임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와 마찬가지로 매우 불안하고 어둡습니다. 너무나 빠른 세상 속에서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마음은 쉽게 지쳐버리는 일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은 오늘날에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우리의 가슴 속에 두려움이 기준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십니다. 가치가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과거에 전해진 소식이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를 초대하시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이 좋은 소식을 우리만 가지고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빛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듯이 이 진리의 소식이 세상 모든 곳에 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작은 친절, 묵묵한 신뢰, 포기하지 않는 희망, 이 모든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메아리로 우리의 가정과 이웃, 동네, 직장, 가게로 퍼져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좋은 소식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으로 흘러들어갈 때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이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역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세상에 흘러 들어가길 바랍니다. 이 소식은 생각보다 멀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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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
    아름다운교회 Dec 14.2025 성탄절을 기다리며
    한국에 살았을 당시에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마다 캐롤이 울려 퍼지고 건물들에는 온갖 장식들이 화려하게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백화점이나 대형마켓들은 누가누가 더 화려한가를 대결이나 하는 듯이 엄청난 돈을 들여 장식을 하고 사람들은 끌어 모았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유명 쇼핑몰이나 호텔을 가면 화려한 장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화려함과 연결이 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약 2,000년 전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오신 베들레헴은 화려한 불빛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했을까요? 그곳은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했을까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인구조사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권력 유지에 집착해 폭정과 불안을 낳았고, 백성들은 정치적, 경제적 억압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그곳은 화려하고 밝은 불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만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도 호텔이나 병원이 아닌 마굿간이었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함이나 권력이 아닌 겸손과 낮아짐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겸손과 섬김과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화려해지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려하고 멋있고 잘 갖추어진 곳에 가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화려함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은 없는지, 화려함 때문에 찾아가야 할 사람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화려함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소외된 이웃이 분명히 있습니다. 강한 빛을 보고 나면 눈이 뿌옇게 됩니다. 화려함을 한번 보고 나면 우리의 눈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화려함에서 일단 우리의 눈을 떼야 합니다. 그래야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우리의 이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섬겨야 할 대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찾아가서 일으켜 줘야 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우리가 낮은 곳을 향하여 갈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통해 이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요? 화려함의 유혹을 잘 피하시고 우리의 이웃을 돌보는 시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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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
    아름다운교회 Dec 07.2025 함께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지난 주 수요일 저녁예배에 에베소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을 한번 더 여기서 나누려고 합니다. 수요일에 오셨던 분들과만 나누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함께 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요즘 수요일 저녁예배에서는 에베소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는데 지난 주에는 3장의 말씀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서 6절 말씀을 보다가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 말씀에서 “함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들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도 감격스러운 사실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함께”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교회는 “함께”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는 우리들은 “함께” 하는 법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불완전한 우리들임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나온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나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죄로 인해 “함께”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해 이 부분에 대한 감각이 아예 부패해져 버린 것이죠. 죄는 인간을 나밖에 모르는 존재로 타락시켰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서로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나옵니다. 아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함께”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함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나옵니다.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함께”하지 않거나 “함께”할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이 모든 은혜를 받은 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함께” 이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이것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이 날마다 싸우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약간은 밀릴 수 있으나 결코 패배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담도 완전히 허물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해졌습니다. 그때 우리도 십자가에 함께 죽었습니다. 나밖에 모르던 나의 삶, 이기적이던 나의 삶,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만 하려고 하던 나의 삶,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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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3
    아름다운교회 Nov 30.2025 순종하는 자만이 아는 기적
    우리는 연말이 되면 마음 속에 한가지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교회 사역에 한가지는 동참해야 하는데 지금 형편이 그럴만한 상황은 안 되고,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하고 앉아 있기는 뭐하고.. 그래도 우리 아름다운교회는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보통의 교회들이 연말이 되면 안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인데 너도나도 동참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땅에 숨겨두신 놀라운 비밀 한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하는 자만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고 가장 처음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결혼 풍습에서 포도주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큰 일이 났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기대하며 포도주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사실상 거절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어머니의 믿음이 대단합니다.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명령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예수님께서도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시고, 하인들은 이에 순종합니다. 성경은 하인들이 물을 항아리 아귀까지 채웠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께 완전한 순종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연회장에게 물을 갖다 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하인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다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서 보통은 좋은 포도주를 처음 내고 나중에는 낮은 것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잔치에서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 이 사건에서 사람들이 나중에 마셨던 포도주가 사실은 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하인들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누구였습니까? 하인들만 알고 있었죠. 그래서 성경은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만 알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sign)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위해 이땅에 오셨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셔서 물을 포도주로, 병든 자를 회복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상황과 환경에 매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다시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을 오직 누구만이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까? 순종하는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환경과 상황에 매여 도전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라도 순종한다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알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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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
    아름다운교회 Nov 23.2025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가 일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질문이 한가지 생깁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고는 하는데 그러면 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해야 하는 일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일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했던 교훈은 매우 강력한 어투로 되어 있는데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 곧 죽으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르게 행하고 도무지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수고하여 애써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대로 움직여 갑니다. 하지만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인지 발견해 가야 하는 것이지요.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 100%, 인간 100%”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인간도 같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합력해서 구원을 만드는 것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에 있어 인간의 공로가 개입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No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100%, 인간 100%”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100% 반응하는 믿음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과 우리에게 믿음 주신 것이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 17차 다니엘 세이레 특별새벽기도회가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여 주셨음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특새는 이전보다 더욱 저와 성도님들의 마음 속에 기쁨이 넘쳤고 감사가 넘쳤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힘이 든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시간시간마다 얼마나 은혜를 부어주시던지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시작도 마지막도 하나님이 모두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 더 큰 기쁨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드리는 우리의 100%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100% 반응했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었던 기쁨과 즐거움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이번 특새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100% 반응할 때 주시는 기쁨과 감사를 삶에서도 경험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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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16.2025 자녀들과 함께 하는 특별새벽기도회
    현재 우리 교회는 특별새벽기도회를 3주동안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주만을 남겨 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감격을 회복시켜 주시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삶의 문제들에 해결함을 받은 분들도 계시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분들도 계십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응답하시는 하나님, 실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지요. 특별히 토요일 새벽에는 다음세대 자녀들을 앞자리에 앉게 하고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이들이 45분 정도 되는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몇몇 아이들은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옆 친구와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어른들의 예배에 방해를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불편해 하는 어른들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대부분이 어렸을 때는 그랬습니다.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시간도 아닌데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그 시간에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니요.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면 몸이 꼬이고, 근질근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만 끝나면 밖에 나가서 뛰어놀기에 바빴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언제나 예배에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자리에 앉아 예배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앉아 있게 하셨죠. 그런데 신기하게 그때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지, 그때 다같이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옆에서 울면서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강단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인도하시던 목사님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떤 분은 차가운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얼굴은 바닥에 대고 흐느끼며 기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뜨겁게 울려퍼지던 찬양소리, 간절한 마음으로 드렸던 기도소리, 함께 앉아서 예배 드리던 공간에서 전해오던 따뜻하고 훈훈하고 감격적인 어떤 느낌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예배시간에 임하신 성령님의 임재의 경험들이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일 때 나도 거기에 있겠다고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임재를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체험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미국에서 자라나고 있는 우리 다음세대 자녀들은 언어적으로도 통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전하는 메시지를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어려운 어른의 말을 한국어로 들어야 하니 아마도 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임재를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자녀들이 꿈을 꾸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비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하는 것, 그것은 부모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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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Nov 09.2025 회복과 부흥은 참된 회개로부터
    평양대부흥은 한국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건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 한국교회가 세워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의 이러한 중요한 위치 때문에 평양대부흥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평양대부흥 이전에 있었던 원산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1903년,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있던 하디 선교사는 자신의 노력과 열심히 선교를 했지만 뚜렷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선교 사역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자신이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선교의 실패에 대한 원인이 자신의 교만과 실수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인을 무시하고 인종차별을 했던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은 회개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만 회개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원산의 한 부흥회에서 모든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한 죄, 선교지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았던 죄 등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자백한 것이죠. 그의 공개적인 자백은 동료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에 있던 성도들 모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집단적인 회개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입술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 성도들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훔친 물건을 돌려주는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고, 깨끗하고 정직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디 선교사 한사람의 회개는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평양대부흥이라는 거대한 부흥의 불길을 타오르게 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부흥과 사회 개혁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회복과 부흥이 한 사람의 참된 회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의 교훈입니다. 지난 한주,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해 오면서 하나님께서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저를 이끌어 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원래 계획하고 생각하고 준비했던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함께 모였던 성도님들까지도 하나님 앞에 다시 서서 회개하는 시간으로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한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공동체, 너무나 사랑해서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지켜가고 싶은 공동체, 그러다가 너무 사랑해서 실망도 함께 하게 만드는 공동체에 큰 회복과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시려려고 우리로 회개하게 하시는 모양입니다.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지역이 살고, 나라가 살려면 회개의 자리에서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는 한사람이 있으면 됩니다. 참된 회개가 회복과 부흥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진행되는 특새를 통해 회복과 부흥의 역사를 맛보고 기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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