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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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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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8.2024 천국열쇠
    언젠가부터 집으로 들어가는 gate remote controller가 작동을 하지 않아서 들어갈 때마다 번호를 누르고 출입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그동안 문제없이 잘 쓰고 있었는데, 아마 게이트를 수리한 후에부터 인지라 그곳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관리사무소에 여러차례 문의하고 하였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배터리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 갈아보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문제는 지속되었고, 오랜 노력 끝에 관리소의 직원과 연결되어 controller code를 받아서 점검을 해보니, 숫자 하나가 틀려있는 것이었습니다. 손댄적도 없었고, 누가 가져간 적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하나가 틀려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내가 가진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10자리 숫자중에 하나만 맞지 않아도 이렇게 아무 응답도 없는 먹통 열쇠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치고 가는 깨달음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에수님께서는 그의 수제자 베드로가 믿음의 신앙고백을 하자 ‘내가 네게 천국열쇠를 주노라’고 하셨습니다(마16:19).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교황권과 연결시켰습니다만 개신교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수천년 전의 이야기였으니 열쇠를 주셨다고 했지만, 오늘날에 주셨다면 이렇게 ‘Code’를 주셨거나 smart key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코드가 맞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열리지도 않을 코드번호 가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만 지속할 따름입니다. 10자리 중에서 겨우 하나만 틀렸다고요? 9개는 맞았다면 문이 반쯤이라도 열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먹통입니다. 그래서 그 코드는 정확해야 하고 단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주파수가 맞지 않아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비슷한 소리도 잡을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맞아야 합니다. 코드가 틀리면 무용지물입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다루고 있는 본훼퍼 목사님의 ‘나를 따르라’ 첫 번째 주제가 ‘싸구려 은혜와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제자도가 없는, 헌신과 희생이 따르지 않는 복음과 신앙생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가짜 은혜, 싸구려 복음으로 무장하고도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하고, 아무런 변화도 도모하지 않는 싸구려 신앙인에게 이 천국 열쇠의 코드를 대입해 보면 딱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믿은 것에 대한 증명을 무엇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심판자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경외함으로 우리 신앙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희생없는 십자가가 훨씬 매력적입니다. 왜냐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희생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짜 복음, 싸구려 복음은 참된 회개없이도, 변화된 증명서 없이도 천국열쇠를 줬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열리지 않는, 코드가 맞지 않는 천국열쇠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이 천국 열쇠가 정작 천국문앞에서 열리지도 않는 가짜가 아니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지금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요청에 기꺼이 순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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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Sep 01.2024 거룩한 부담감
    선교주일을 통하여 교회의 사명의 방향을 늘 뒤돌아보려고 우리 교회는 매해 5-6차례 선교주일로 정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의 절기는 한번씩으로 지나가는 반면에 선교주일은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키는 것은 그만큼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교회가 개척된 이래 지금까지 중단없이 진행되어 온 일이기도 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때론 이 행사가 의례적인 것에 그친 적이 없었는지 죄송한 마음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늘 일정하지 못합니다. 너무 오래, 자주하다가 보면 통과의례처럼 지나가는 것이 인간의 습성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의 식사도 자주하다가 보면 일상의 음식처럼 특별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쌀밥만 먹지 못하게 하려고 국가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보리를 몇%정도 섞어 먹으라고 계몽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도시락에도 그렇게 하도록 검사까지 하던 시절입니다. 이제는 쌀밥이 싫어서 어쩌다 먹는 보리밥, 꺼끌꺼끌해서 목에 잘 넘어가지 않던 순보리밥이 건강식이 되어서 서로 돈주고 사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선교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세상의 끝이 언제냐고 물을 때에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는 때’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지말(末世之末), 세상의 종말의 가장 끝에 있을 정도로 마지막 시대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라면 그 종말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교회의 희생, 나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해야만 하지만 하기가 힘든 일이기에 마음 한켠에 부담감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주님의 명령이요 부탁이기에 ‘거룩합니다’. 이것을 알기에 교회와 성도들은 감사함으로 이 일을 잘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14개지역의 선교사님들과 연결하여 기도와 물질로 돕고 있습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그 사역에 동참한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저 역시 이제 은퇴를 앞두고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준비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퇴이후에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그저 삶을 영위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평생을 몸담아 왔는데, 그 마지막에 그저 편안한 삶을 자처하며 살기에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 마지막의 사역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을 찾아가는 것임을 제 마음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게는 부역의 부담감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감’인 셈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선교주일로 지키는데, 명칭이 선교주일이 아니라, 우리안에 있는 이 ‘거룩한 부담감’을 은혜로 표현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임을 확신하기에 교회는 이 거룩한 부담감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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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25.2024 유산 남기기 운동
    천주교같은 중앙집권의 정치구조를 가진 종교에서는 원래부터 그 종교가 가진 재산이 많기 때문에 개 교회(성당)의 운영에 그리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개 교회는 온전히 자신들의 몫입니다. 세상의 교회들 가운데 자립하는 교회는 불과 20-30%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의 교회들이 처한 환경은 참으로 열악합니다. 언젠가 베가스의 어느 미국 교회의 목회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교회가 반듯한 건물을 가지고는 있지만 교인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 모이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궁금한 것은 어떻게 교회를 유지하며 운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그 목사님은 ‘사실 교인의 숫자나 경제적 여력을 생각하면 정말 운영이 어렵다. 그래도 교회가 유지 가능한 것은 그분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 유산을 전부 교회에 남기고 떠나기 때문에 그 힘으로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입니다. 미국의 백인 계통의 사람들은 유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전통보다는 그것을 사회나 교회에 돌리는 의식이 강합니다. 동양인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조그마한 것 하나라도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채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너무나 못살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당했기 때문에, 없어서 고생했던 그 인생을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 그래서 그런 마음의 부담감이 우리의 의식속에 잘 박힌 못처럼 박혀 있다는 사실은 십분 이해가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 자식에게 단돈 100불이라도 유산을 남겨주지 않으면 미안해하고 죄의식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정서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은퇴를 앞두고, 은퇴이후의 삶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계획을 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유산을 교회에 남기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 그것은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까운 마음이 들 수도 없다. 주님이 주신 것이라면 유산의 일부를 교회에 남기는 것은 오히려 성경적이지 않을까?” 그 지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죽으면 그 돈은 내 돈이 아닙니다. 살아서 죽으라고 안먹고, 안쓰고 모았다가 죽으면 고스란히 남의 수중에 들어가는 그 재산, 그것 때문에 자식들과 부모자식간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살아있을 때만 내 돈입니다. 죽으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남의 돈이 됩니다. 지금 내가 써야 내 돈입니다. 남겨놓고 죽어서 쓰겠습니까? 그래서 가진 돈은 자기가 쓰고 가야합니다. 자식들은 그냥 자기들이 살아갑니다. 내가 살아왔듯이 자식들은 그 돈 없어도 그냥 삽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뭐가 그리 아깝습니까? 내가 남길 유산이 좀 있다면 그 일부 혹은 전부를 우리도 교회에 드려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도록 한다면 주님 때문에 이렇게 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고백으로 어차피 내 돈도 되지 못할 그것을 주님께 드리고 가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회에 유산을 남겨주도록 유언장 남기는 운동,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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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8.2024 우렁각시
    한국의 전래 동화에 ‘우렁각시’가 나옵니다. 한 농부가 혼기가 넘었지만 장가들지 못하고 혼자 일만하는 서러움을 내뱉으며 ‘나는 도대체 누구와 사나’라고 탄식하자 어디선가 ‘나와 함께 살지’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아무도 없고 커다란 우렁 하나가 길곁에 있음을 보고 사람의 발에 밟혀 깨질까봐 조심스럽게 항아리에 넣어주었답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자기가 일을 하고 고된 몸을 끌러 집에 들어와 보니 누군가 청소도 해놓고 밥상을 곱게 차려서 놓은 것입니다. 잠행을 한 끝에 알고보니 자신이 넣어둔 우렁이 항아리에서 어여쁜 색시하나가 나와서 그 일을 합니다. 자신 몰래 이 일을 한 것입니다. 농부는 이 색시를 붙들고 정체를 묻자, 이 우렁이는 용왕의 딸이었는데 벌을 받아서 우렁이가 되었고, 농부가 잘 보살펴 준 것을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결국 용왕님의 딸인 우렁색시와 결혼하여 잘먹고 잘 살았다는 흐뭇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사님도 자신이 홀로 있을 시간에 ‘우렁각시’의 도움으로 잘 먹고 살았다고 자랑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네들은 예기치 않은 도움을 받아 어려움이나 고난을 이겨낸 우렁각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삶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는 도움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유무형으로 받는 도움을 말하라면, 제 경우에 정말 손가락 발가락이 모라잙 정도로 수많은 도움속에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렁각시 같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먹었다고 시비걸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이 우렁가시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포장된 은혜였을 것입니다.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지 못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렁각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레던드가 되어서 마음 푸근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렁 각시는 우리 크리스찬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렁각시처럼 남몰래 선행을 베풀고, 베푼 선행과 섬김과 봉사에 대해서 나팔불지 않고 겸손히 감사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바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아니, 이게 어찌 말이나 됩니까?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찌 모를 수 있습니까? 그만큼 자랑하지 말고 나팔불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렁각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칭찬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면서 칭찬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알아주지 않거나 무시를 받으면 화가나거나 따지기도 하고, 때론 심술가지 부리며 자신의 한 일을 알아달라고 소리를 지는 일들이 교회안에서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네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이 갚으리시라’는 말은 소용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한 일이 크다고, 독과점을 누리는 기업들처럼 자신의 몸가치를 한층 높여서 ‘deal’까지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렁각시가 되라고 하는데 우리는 빨리 밝혀지고 싶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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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11.2024 올림픽과 신앙
    프랑스 파리에서는 2024 하계 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립니다. 지난 7월 26일부터 펼쳐진 올림픽 무대에서는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지난 4년간 갈고 닦았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뜨거운 젊음의 향연을 아낌없이 치루어내고 있습니다. 울고 웃고, 좌절하고 환호하면서 스포츠를 통해서 온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선수들이 파견규모가 가장 적은 규모로 Team Korea를 외치며 입성하였는데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면서 30개의 메달을 달성하였다고 합니다. 메달의 유무를 떠나서 한 분야에서 기량을 연마하고 자기 성취의 장이 되었다는 것이 큰 감격이지 싶습니다. 이러한 올림픽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먼저는 메달을 따는 선수들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면류관을 얻도록 달려가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고, 그 영광은 가히 올림픽 메달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노벨상,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앞에서 받는 상급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 상을 받도록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고전9:24).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에는 헛됨이 없다고 하십니다(고전15:31). 메달을 따든 못 따든 선수들이 흘린 땀의 노력은 얼마나 값진 것일까요? 비록 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지만, 4년동안을 이 메달을 위해서 흘린 눈물과 땀과 고통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화려한 영광의 뒷켠에는 늘 부상에 시달리고 고된 훈련에 남몰래 눈물의 씨앗을 뿌려야했을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훈련도 없이, 고통도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공짜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훈련 자체가 영광이고 면류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훈련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가만히 편안히 누워서 금메달을 딸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기적은 아예 없습니다. 거기에는 절제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기와의 호된 싸움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넘지 않으면 화려한 영광은 기대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지요. 훈련없이 되는 경건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런 호된 고통의 과정이 없는 경건이 있다면 그것은 ‘경건의 모양’일 뿐입니다. 진짜 ‘경건의 능력’은 이러한 영적 훈련과 씨름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부딪히는 모든 싸움과 역경들을 잘 감당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훈련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게으른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훈련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메달의 영광은 그 선수의 능력에 나온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혼자 그 일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가 정상에 오르기까지 곁에서 도와주고, 훈련시켜주고, 격려해 주고, 함께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또한 감사하게 됩니다. 자주 우리는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나 혼자 잘나서 이렇게 성장했노라고...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나를 키워준 분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것이 성숙한 모습일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가 요구됩니다.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곁에서 길러준 분들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양식또한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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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04.2024 하나님의 깊으신 뜻
    우리는 항상 이분법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리냐를 가지고 이분법으로 생각하여 판단하려고 합니다. 유교적 배경을 가진 한국인의 정서가 늘 그랬습니다. 그래서 협의와 타협보다는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탓하며 정파싸움을 했던 우리네 슬픈 역사를 닮아서인지 우리도 역시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노회장이 되어서 한번은 교단 총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진기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사회를 보던 총회장에 대한 회원 몇 명의 불만이 제기되자, 그 즉시로 총회장이 사회권을 부총회장에게 넘겨서 과연 총회장이 불법하게 회의를 진행했는지에 대해서 심의하고 그것이 부결되자, 다시 총회장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이 평온한 모습으로 사회를 진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들 같았으면 감히 총회장을 모해했다고 제명하자고 하고,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싸우면서 편이 갈라졌을 법한 일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의 문화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우리 같으면 싸워야 할 것들이 합리적으로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일들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며, 우리 안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기분나쁨’으로 인해 서로 원수를 맺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우리 선조를 닮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수요예배에 묵상하고 있는 책이 ‘하나님의 열심’(박영선 저)입니다. 지난 주에 다룬 내용이 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감명 깊었던 것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었습니다. 욥은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일어나느냐’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네가 그런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욥기서의 대부분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입니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두고서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결국은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그렇지만 욥의 질문인 ‘이런 고난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답을 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을 우리의 성숙함’이라고 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습성은 누가 옳으냐, 누가 틀렸냐에 대해서 지나치게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6.25전쟁동안에도 동족상잔의 비극에도 동원되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누가 잘하고 잘못했느냐에 집중하면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원수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일상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참 가슴아픈 일입니다. 언젠가 어느 권사님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무엇이 우선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누가 얼마나 옳고 틀렸느냐에 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옳으냐보다는 그 이상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우리의 성숙함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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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8.2024 생각이 바뀌면...
    언젠가 한국의 경찰서 현수막에 이런 문귀가 사용되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미래가 바뀝니다” 그렇다면 생각이 안바뀌니까 삶이 안 바뀐다는 말이잖아요. 정말 그럴까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 부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막 장가를 보낸 아들을 바라보면서 ‘이젠 아들이 아니라 손님 혹은 며느리 남편’이라는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서로에게 있는 앙금어린 대화가 오갈 때 즈음에 어느 사모님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요, 처음에는 정말 속상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이 철없이 구는 아들 내외를 보면서, 이 아이들이 내 자식이 아니라 우리 교회 초신자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교회에 오는 새신자를 우리는 정말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해서 밥도 해주고, 칭찬해주고, 대접해 주지 않나요? 그 새신자에게 밥해라, 네가 먼저 이렇게 해라 주문하지 않고 그저 귀빈 모시듯 대접해도 기쁘잖아요. 마치 그런 것처럼 우리 아들 내외에게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다음부터 평안을 찾을 수 있었어요”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이라면 이 말이 정말 이해와 공감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왜냐면, 정말 교회안에서 새가족이 찾아오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쁜지 그들이 아무 것도 안해도 그저 행복하고 감사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왜 설거지 안 하느냐, 왜 이런 일은 이렇게 안했느냐 문책하지 않습니다. 있는 존재만으로,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귀하고 사랑스러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 내외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진리였습니다.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며느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새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런 큰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경우가 바로 이런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생각이 삶을 다르게 만들고, 행동과 결과를 다르게 만드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좋지 않은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올 때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서 기도하면서 한번 꿀꺽 참아보고,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어 보는 것입니다. 혹시 내 삶에 어려운 문제가 닥쳐올 때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문제를 해석하는 것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배와 같은 지혜(지금 당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를 묵상하면서 더 나은 나, 더 성숙한 생각으로 결과를 바꾸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천사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문제가 많은 인간입니다.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들이 아무리 죄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어머니라 할지라도, 그 역시 죄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평범한 여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을 인정하고, 그 껍질을 벗으려는 성화(聖化/Sanctification)속의 인간임을 인정하고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것만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같은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면 은혜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나쁜 것으로 받으면 쓴나무 열매만 먹게 됩니다. 생각이 바뀌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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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21.2024 우연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필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별로 유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사용했던 용어들도 버젓이 기독교안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생각없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입니다. 인연이라는 말은 불교적 색채가 강한 용어이지만 자연스럽게 쓰는 용어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일어난 일들이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되어지는 ‘우연한 인연’이라고합니다. 그럴까요?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것이 생각없이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독실한 미국인 자매는 왜 ‘happ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느냐, ‘take place’라고 사용해야한다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요즘엔 많은 생각이 마음을 스쳐지나갑니다. 일어났던 사건과 사고들 그리고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곰곰히 그것들을 묵상하다가 소스라치게 나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에는 그일이 왜 일어났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고, 왜 그 상황에서 그 일이, 왜 그 시간에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이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몰랐는데, 지나놓고 보니, 이제야 퍼즐 조각 맞추듯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은 ‘아,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천한 생각을 가진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때론 원망과 한숨속에서 지내기도 하고, 때론 막연한 훈련으로만 이해하고 견디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시간에, 하나씩 꺼내어 들고 다시 보니, 그냥 그것이 우연하게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필요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선생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미리 아시고, 피할 길이 되기도 하고, 채찍이 되기도 하며,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게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깨닫고 생각하니 그저 하나님앞에 감사할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쓴뿌리를 집어살킬 때에는 그저 억울하고 상처난 마음 때문에 힘들기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필연’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제야 철이나서 보게 된 것이지요. 문제의 시점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그림이 너무나 모호해서 하나님이 그리신 것같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뒤돌아볼 때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의 밑그림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짧은 싯귀처럼, 혼자 걷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투덜대는 것이 우리이지만 결국, 그 한 사람분의 발자국은 내 발자국이 아니라 나를 업고 건너신 주님의 발자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곧 오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셉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날이 오게 되고 감사함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그 사랑하는 자녀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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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4
    아름다운교회 Jul 14.2024 왜 안내려 놓으시나...
    세월이 정말 빠르게 지나갑니다. 20대에는 20km, 40대엔 40km, 80세엔 시속 80km의 속도로 달리는 것과 같이 인생의 속도를 느낀다고 하듯, 70대를 향하여 가고 있는 저는 시속 70km가 아니라 140km로 달리는 느낌입니다. 눈을 감고 뜨고 하루, 한달, 일년입니다.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 앞에 선 사람들의 조급함이 느껴집니다. 저 역시, 이제 은퇴할 일정이 6개월정도 남겨두고 있으니 더 그런 마음이 듭니다. 이 시간은 교회가 요구한 시간이 아니라 저 스스로 하나님앞에 서약하고 교회앞에 약속한 책임의 시간입니다. 목사의 은퇴는 규정에는 없지만 70세에 하는 것으로 일반화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서 저는 교회를 위하여, 그보다 더 이른 66세에 은퇴를 결정하고 후임목사를 청빙하였습니다. 주변의 많은 목회자들이 조언하는 것처럼, 70세에 은퇴하면서 부교역자를 두고, 힘에 부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속도조절과 힘의 분배를 적절히 하면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기 은퇴가 하나님의 뜻으로 보았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저 스스로는 많은 것들을 이미 내려놓은 것입니다. 막상 은퇴의 날이 가까워지면서 참 많은 생각들이 마음을 지나갑니다. 교회 개척의 지난 15년간, 저와 아내는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목회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한 교회를 사임하고 다른 교회로 이임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자체를 그만두는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목회했습니다. 목회외에 해 본 일이 없습니다. 다른 목회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평생 해오던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은 제 자신의 정체성과 방향성에 대한 극도의 고민과 갈등을 거쳐야 합니다. 이곳에서 사역을 마치고 다른 사역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그냥 해오던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목회 그 자체를 안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혼란과 싸워야하는 일이라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것은 평생 일해온 직장을 그만두고 은퇴를 하는 모든 직장인들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마지막 남은 6개월의 시간을 후회함이 없이, 하나님이 부르심의 마지막 사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사명이고, 주님앞에서의 서약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후회없이 마무리 하기 위하여, 바울이 마지막을 향해 달음질하는 고백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 마지막 사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왜 아직도 안내려 놓으시냐고 말합니다. 물론 제 건강회복과 은혜로운 삶을 위해서 걱정해 주시는 말로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저를 위한 격려의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목회를 후회없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제 결심에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군대 말년처럼 보낼 수도 있지만 끝까지 달려갈 길을 완주하여 주님께 잘했다 칭찬받는 종이고자 하는 것이 제 결심입니다. 이것이 주님앞에서 평생을 달려온 목회자의 각오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니 더 내려놓을 것은 지금 더 없어 보입니다. 마지막 은퇴의 시간의 날까지 저는 내게 맡겨진 책무와 은혜의 일을 위해 끝까지 달려갈 것입니다. 이 길을 잘할 수 있도록 기도와 협력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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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3
    아름다운교회 Jul 07.2024 이웃사랑 실천하는 사람
    강아지들이 자기들이 살던 집을 탈출했습니다. 지난 주에 3번씩이나 야밤도주를 했던 교회의 개들이 그나마 안전하게 집으로 복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사랑이 풍성한 이웃들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이 이미 늦었는데, ‘너네 개들이 나와서 내가 지금 보호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조치를 하고 또 얼마 있지않아 개들이 나와서 데리고 있다는 연락을 다시 받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나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실수로 나갈 수도 있는데, 곧 바로 이어서 다시 나갔다는 것은 어딘가에 ‘구멍’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멍을 메우지 않으면 계속 나갈 것이기에 늦은 시간임에도 나가서 그 ‘구멍’을 찾아서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를 데리고 있다는 이웃에 사는 분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보니, 한 마리만 있고 다른 한 마리는 행방을 모른 상태였습니다. 이 강아지 둘은 한번도 따로 돌아다닌 적이 없습니다. 늘 같이 있는데 이번에는 한 마리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를 몰고 주변을 탐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네가 차를 타고 개를 찾으러 다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도 차를 가지고 개를 찾아보겠다고 합니다. 이미 그때가 밤 12시가 넘은 시간입니다. 고맙지만 늦은 시간이니 괜찮다고 들어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차를 몰고 나와서 함께 찾아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분들이 개를 찾아서 교회로 데리고 와서 상황이 안전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집 강아지들은 행운아들입니다. 나갈 때마다 지나가던 이웃들이 붙잡아 교회로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이웃은 좀 특별한 것 같습니다. ‘자기는 유대인이지만, 성경에 쓰여진대로 이웃을 돕는 것이 전통이고 말씀의 가르침이다’고 하면서 내가 자기의 이웃이기에 아무 때나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도우며 살자고 문자를 주고 받았습니다. 아무 관계도 없고 어떤 안면식도 없는데도 이웃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편함을 내 던지고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던 유대인 이웃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 강도만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지만, 정작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인정하는 내가, 만일 똑같은 상황을 내가 만났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늦은 시간에 발벗고 이웃의 애탐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인지 되물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유대인 이웃이 몰고 나온 차는 고급차량이었습니다. 그 차에 개를 찾으면 싣고 오겠다고 한 것도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차 시트가 더러워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결심이었던 것이지요. 언젠가 벤츠를 타던 교인이 있었는데, 어느날 차량봉사를 나갔다가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시트에 묻혔다고 불평하면서 다시는 라이드 봉사 하지 않겠다고 하는 모습이 overlap되면서 그 유대인 이웃의 헌신이 다시 예수님의 말씀처럼 묻어나왔습니다. 이 이웃은 성경과 전통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까지 지키고 있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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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2
    아름다운교회 Jun 30.2024 크리스천의 얼굴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의 상태가 얼굴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차 있는 것들이 분노, 사랑, 무관심, 짜증, 미움등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의 표정을 보면 마음의 상태까지 보게 되는 것은 전혀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받으면 은혜의 표현이 얼굴이 나타나고, 은혜를 저 버리면 그 역시 얼굴에 그대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방문하여 여러 교회를 집회인도 혹은 예배참석을 위하여 다녀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녀 본 교회들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딱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예배를 참석하는 교회의 교인들에게서 그 교회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은혜가 많은 교회는 성도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습니다. 표정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만난 적도 없는데, 눈길이 마주치거나 옆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안내자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성도들끼리도 서로 밝고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훈련이 잘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들 안에 은혜가 넘치고 사랑이 넘쳐서 그렇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반대의 교회와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누가 옆에 앉았는지, 누가 오는지, 스쳐지나가도 인사하는 법이 없고,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은혜가 넘치면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이 흘러 넘쳐서 얼굴에도 빛이 나게 합니다. 그러면 대번 알아차립니다 ‘아, 이 분이 은혜를 받고 있구나’ 우리가 한 이성을 사랑해도 그렇게 다르지 않나요? 표정이 바뀌고, 말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어집니다. 그래도 누구나 알아차립니다. 그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고 말이지요. 인간을 사랑해도 그런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마침내 나를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분의 사랑에 접촉된 사람들은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보다 더 독한 사랑으로 붙잡히게 되는 것이 복음의 본 모습입니다. 그래서 언어가 달라지고 삶의 내용이 달라지고, 심지어 인생의 목표까지도 달라지게 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많은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아름다운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밝은 미소와 감사의 언어들로 삶의 변화를 고백하는 아름다운 분들이 대부분임을 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목사로서의 욕심은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 ‘성도의 교제’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표현되는 얼굴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환한 웃음과 표정이, 내 삶이 잘되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모든(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행복과 기쁨 그리고 감사와 축복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들어오거나 나오는 여러분의 표정속에서 이미 예수님을 읽고 드러낸다면 어떤 교회와 공동체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분들이라면 내 행동의 습성에서도 그 행복이 아름답게 표현되는 훈련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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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1
    아름다운교회 Jun 23.2024 덕을 끼치는 삶
    어른이 되면 입은 닫고 주머니를 열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하다면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즐거움도 클 것입니다만 주머니가 비어있다면 간단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습니다. 하자만 주머니는 단지 돈만 채우는 것을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른 것들로 채워서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채우는 것은 바로 ‘덕(德)“입니다. 덕이란 ’어질고 바른 행동이나 마음‘이라고 정의됩니다. 즉 덕을 끼치는 것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마음이나 행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더하라‘(고후1:5~7). 단어와 그 단어의 순서 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지식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덕‘을 쌓으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식이 앞서면 교만해져서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르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 상하지 않고 가르칠 수 있고, 그 가르침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덕을 끼치는 삶‘이 중요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이 부분을 간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소위 ’가르친다‘는 이유로 우리의 지식을 사정없이 휘두르다가 보면 오히려 그 가르침이 독이 되어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나는 선한 마음으로 가르쳤지만 듣는 이는 그 선한 마음보다는 ’덕과 지혜가 없이 말부터 나오는 부덕함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안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는 ’자신의 봉사와 헌신‘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월급도 받지 않고, 다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저 주님을 사랑함으로 헌신하는 것이 다른 어떤 공동체와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좀더 친절하고, 좀더 다른 이의 마음을 살피고,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어른들은 좀더 인내하면서 부드럽게 젊은 이들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젊은이들도 이해와 인내로 어른들의 이야기를 경청도 해야 합니다. 일을 하다가 보면 마음이 앞서거나 말이 앞서는 것 때문에 쉽게 마음이 닫힐 수 있습니다. 이 덕을 나타내려면 ’참아주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막 숟가락질을 배운 어린 아이에게 왜 그렇게 밥을 흘리며 먹느냐고 비난하고 책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칭찬해 주고 기다려주면서 격려합니다. ’아, 참 잘 했어요. 맞아 그렇게 하는거야. 옳지 잘했어!‘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속에서 열불이 나겠지요. 왜 아직도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 핀잔을 주고싶은 마음이 많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한 아이를 다룰 때에도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지요. ’덕(德)‘을 끼치면서 서로 기다려주고, 절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웃음이 넘치는 생활은 바로 ’덕을 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순간 짜증이 일어날 수 있지만, 덕을 끼치기 위해 한번 더 웃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덕을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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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0
    아름다운교회 Jun 16.2024 선교를 생각하며
    6월은 선교의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원래 한 주간을 선교주간으로 정하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님을 돌아보고, 선교의 마음을 고취하고, 지역교회나 사각지대가 있는 곳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들을 해오고 있었는데, 올 해에는 한 주간만이 아니라 6월 전체를 선교를 생각하는 기간으로 확장하여 처음으로 시행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간동안 온 교회가 선교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심는 고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교회가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 한달간의 귀한 사역의 시간을 무시하지 않고, 선교기금을 마련하고, 전도의 물꼬를 틀고자 하는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다시피, 현 시대는 교회의 위기의 시대라고 불리워집니다. 사람들이 인식하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의 생존을 이야기하면서, 교회의 확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모순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 땅에 펼치는 것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형편에 집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하면 그 일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이 일을 앞장서 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에, 하나님께서 앞장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두려움을 이기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증언하며 다닐 때에 하나님께서는 따르는 표적과 이사로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말을 좀 뒤집어 보면, 믿고 전파하면 하나님이 일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자기 형편에 집중하면 하나님도 일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그 일은 믿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일을 볼 수 있는 축복을 다른 사람이 취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이미 하나님의 열심히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 축복된 일에 우리가 동참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유대인은 그것을 놓쳤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맏아들된 유대백성은 그 축복과 영광을 발로 차 버렸습니다. 그러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멸시했던 이방인들에 의해서 복음이 더더욱 세계로 뻗어가는 영광을 부러움처럼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시대의 사명을 외면하면, 하나님의 손해가 아니라 우리의 손해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본질적인 사명을 외면하고 친교와 교제중심으로 교회를 이루는 일을 최고의 가치고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의 불행이고, 성도들의 불행입니다. 교제에 집중하면 교회가 화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투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배에 올라, 우리끼리 파티하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의 영적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전함이 교회입니다. 그것은 지금 한 영혼을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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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
    아름다운교회 Jun 09.2024 내 교회를 사랑하는 것
    한국 방문을 마치고 복귀하였습니다. 지난 해에는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아서 1개월간 병원신세만 지다가 왔는데, 이번 방문은 오직 건강회복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된 것이지요. 차이가 있는데, 작년은 병원만 다니느라 좋은 여건속에서도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했지만, 이번 방문은 그나마 정말 쉼다운 쉼을 가졌고, 건강회복의 틀을 마련하여 돌아온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정말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묵상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교회의 중요성’입니다. 방문 기간동안, 강단위의 설교자로 서보고, 강단 아래의 평신도의 자리에 앉아보기도 하였습니다만, 그 자리의 어색함은 형언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위의 여러 목회자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어렵고 아쉬운 것은 ‘내 교회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드러내놓고 기도하기도 어렵고, 사람들과 교제하기도 어렵고, 마음놓고 헌신할 수도 없어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만 되면, 오늘은 어느 교회로 갈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라고 합니다. 그저 예배만 빨리 마치고 돌아오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 자리, 내 교회에 돌아오게 되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찬송도 기도도 교제도 마음껏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 교회’란,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 소유의 교회도 더더욱 아닙니다. ‘내 교회’란 내가 편한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은혜롭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길 수 있는 그런 교회일 것입니다. 익숙한 환경에서 편하게 교회를 다닐 수 있어서, 내가 물질을 가장 많이 냈으니,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헌신했으니 내가 주인이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각 교회의 초청받아,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교회에서부터 개척교회까지 다 다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회자들로부터 듣는 공통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눈물뿌려 헌신한 성도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생활도 돌아보지 않고, 형편과 처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주님의 일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마음을 다해 헌신하시는 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특징은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예수님의 교회로 알고 그렇게 밑빠진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복귀해 보니 그 생각이 더 깊어졌습니다. 산해진미가 쌓여있는 한국의 좋은 음식들도 맛이 있었지만, 내 교회에서 먹는 밥과 커피맛이 어느 일류식당보다 더 맛이 있는 것은 바로 ‘내 교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온 몸을 드리셨습니다. 이 ‘내 교회’는 그 사랑을 아는 사람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바로 우리들의 교회,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모든 헌신은 하나님 나라에 기록될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소자에게 준 냉수 한 그릇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내 교회’를 가지고 계신 성도들은 정말 행복합니다. 손님이 아닌 교회의 주인으로 아름다운 성장을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그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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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28.2024 기대어 사는 삶
    사람마다 사는 처지와 환경이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운바대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사회/윤리 시간에 배워서 그럴 수 있겠지만, 이것은 성경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진기방기한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스릴 사람인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곧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이유는 ‘사람이 독처(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심처럼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이 인간의 본질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가 人(인), 사람 인입니다. 이것은 막대기 두 개를 기대어 놓은 것과 같은 상형문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人間(인간)이란 한자어 말 그대로 ‘사람 사이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면, 과연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세상의 이치입니다. 제 아내가 한국을 오랫동안 가있으면서 혼자 지냈습니다. 유학시절외에는 늘 같이 있었기에 어려운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절실하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음식도 만들줄 알고, 빨래도, 무엇을 해도 어려운 것이 없기에 혼자사는 것에 대해서 크게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혼자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死別(사별)과 은퇴를 경험한 분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갑자기 혼자됨의 혼돈스러운 감정을 느껴보았습니다. 온 세상이 정지되고, 의미가 없어진 삶을 사는 것과 같은 靜寂(정적)이 흘러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아내에게 그런 대화를 하니, ‘부부가 필요한 것은 젊을 때보다는 나이가 들어서 더 필요한데, 서로를 살피는 일이 더 많아서’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황혼이혼을 결심하는 분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살아갈 돈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아닌가 싶지만 정말 사람은 기대어 산다는 것을 절감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군중속의 고독, 사람들 사이에 살지만 그럼에도 고독하다는 말인데, 아마도 그것은 ‘관계’의 외로움일 것입니다. 함께 있으나 외롭다면 그것은 관계맺음이 제대로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기대어 살도록 창조된 것이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요즘 세상은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뽀로로처럼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가족도 소용없고, 남의 도움도 필요없이 기대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전파만 안통해도 고립될 것이 뻔합니다. 핸드폰에 기대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에게 기대어 사는 인생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관계의 分節(분절)이 없는 정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이기적으로 살면 안됩니다. 더더욱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듯, 내 이웃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여 서로 기대어 사는 삶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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