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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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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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26.2022 옛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올 해의 여름 성경학교는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2박3일 정도 하루 2-3시간으로 편성된 일정으로 소화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하루를 잡아서 교회에서가 아닌 곳에서 camp형식으로 열리게 된 것이 특징입니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들로 인하여 당황스러운 가운데 여러 부담을 안고 시작한 캠프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 목회자로서 그 동안 주일학교 지도자나 부 교역자에 의해서 준비되고 진행 된 여름성경학교를 맞다가, 처음으로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느낀 가장 귀한 한 가지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 영특하고, 실력과 믿음이 뛰어나다’ 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 교육이 헛되지 않았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본 것이 제게 는 정말 소중한 발견이었습니다. 이번 캠프는 영어권 선생님들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때보다도 준비와 운영에서 그리고 만족도 에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근래 우리 교회 주일학교는 선생님들이 영어권이 아니고, 나이든 분들이 선생님으로 투입되 었습니다. 하지만 운영되어지고 아이들의 집중력과 응집력을 보면 그 어느 때 보 다도 짜임새있게 운영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이런 관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청년들이 하는 것이야. 특별히 이민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영어에 익숙해져서,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꼭 영어를 쓰는 사람이 해야 하고, 나이든 사람보다는 청.대학부 학생들이 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입니다. 어른도 아이들도 영어를 하는 교사 가 오면 만사가 오케이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영어가 서툴면 이미 한풀 접고 무시합니다. 그러다가 보니, 영어가 편하지 않는 기성세대나 어른들은 아예 주일학교 교사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부모들도 알게 모르게 그런 눈치를 줍니다). 영어를 좀 하는 선생님이 오면 ‘와~~!’ 환영일색이고, 영어를 잘 못하면 ‘에이,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 보입니다. 정말 그럴 까요? 아이들의 영혼을 다루는 문제가 나이와 언어에 관한 것일까요? 그것이 실력일까요? 이런 고정관념이 교회교육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교육, 특별히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교육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감과 영혼 사랑의 열정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제가 유년 주일학교 다닐 때에 주일학교 선생님들 대부분이 젊은 교사들이 아니라 아줌마, 아저씨들인 집사님, 권사님, 장로 님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이모 집사님이 계셨는데, 50대가 훨씬 넘긴 분이 어른 예배가 끝나고 나서 오후 2시에 열리는 주일학교 교사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봉사하시던 분이십니다. 실력이 뛰어나서일까요? 아이들을 향한 영혼구원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캠프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그 집사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 다. 제 친구 어머니이셨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목회하면 할수록 그 집사 님이 생각나는 이유는 주일학교 교육은 젊음이나, 언어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명감으로 하는 것을 더욱 더 느끼기 때 문입니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 빛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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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n 19.2022 우연일까? 하니님의 섭리일까?
    새벽예배를 위하여 달려오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보너스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빛의 향연입니다. 얼마 나 곱고 아름다운지, 어떻게 그 색을 만들어내는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구름이 많고, 전날 바람이 휘몰아 치고나서의 하늘에 그려진 빛과 무늬의 환상적인 조화로움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인생의 풍랑이 어렵고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있기에 인생이 묘미가 있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 다. 교회도 그러하고, 국가나 가정의 경제도 그러하고,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생에 고통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알고 계십니까? 때로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인생 의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 기나긴 침묵속에서도 하나님은 홈런을 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요즘 새벽 큐티가 에스더 성경 입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오묘한 섭지가 마치 ‘우연의 일치’ 처럼 가장되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스더 6장을 보면 그것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왕이 그날 밤에 잠을 못자게 된 것이 우연일까요? 그 잠못이루는 밤에 역사기록을 더듬어 볼 생각이 난 것이 우연일까요? 그 많은 조각난 역사기 록물 중에서 하필이면 모르드개 사건 기록을 꺼내어 온 것이 의도된 목적이었을 까요? 모르드개의 사건을 들으면서 왜 하필이면 그가 상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가 궁금하도록 생각이 든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하필이면 하만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우리 인생에도 이와 같은 역사가 반복됩니다.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상황이 돌아간 것이, 그것이 그렇게 돌아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이 우연의 일치일 까요? 사람들은 두 가지로 결론을 내립니다. 맞아, 그건 우연히 그렇게 된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까닭이 있겠어? 또 다른 하나는 ‘아, 맞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한 가운데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 하나님의 섭리 혹은 뜻이야’ 결국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아닌가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서 갈라집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하나님 의 섭리를 믿고 있는 것일 수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계셨기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믿는 사람은 인생을 그냥 헛되게 보내지 않습니 다. 불평하거나 원망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망과 불평 을 음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 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현실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것 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습니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 1%의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침묵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으신 우리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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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
    아름다운교회 Jun 12.2022 우리 교회의 선교 과제
    팬더믹을 3년 지나는 동안에 인류사회는 많은 변화와 몸살을 겪게 되었습니다. 가장 피부에 맞닿아 있는 것은 경제문제일 것입니다. 정부 도움 때문에 팬데믹 동안 삶이 나아졌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짜 돈을 받았으니 풍성한 삶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회적 비용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앙갚음(?)으로 우리 곁에 찾아와서 고통은 더 배가 되는 듯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위기가 겹쳤다고 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제 눈에는 모든 유통과 생산의 혼란을 팬데믹이 초래했다고 보여지는 것은 어쩔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사회적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그 폐해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나마 다원주의 (post-modernism)으로 인해 신앙생활에 타격을 입던 차에 팬데믹은 그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어치피 당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더욱 불에 기름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탈종교화,탈 교회화 현상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과거에는 교회는 필수 사항이었다면 이제 교회는 선택 사항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physical local church가 아니라 이젠 online church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과거에 한인 유학생들로 붐비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씻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문제일 수 있지만 전반적인 현상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인 유학생들의 유입이 이젠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지난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한인 유학생을 향한 선교가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다민족 청년들을 품는 선교를 교회가 새롭게 열어 가야겠다는 새로운 비전입니다. 그 동기는 ‘K-Pop’으로 일컬어지는 한류문화를 통한 선교입니다. 다행스럽게 BTS나 한국 드라마가 동남 아시아 혹은 중,남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서 많은 청년들이 한국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즉,각 대학에 한글을 가르치는 써클을 만들어 한국 문화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글교육과 한국음식 그리고 음악과 드라마를 통해서 접촉점을 만들어 근본적으로 교회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각 나라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얻게 된다면 여기에 앉아서 선교사를 양성하고 파송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미국 교회와 연결하여 유학생들에 대한 영어능력 향상을 돕도록 하면 아주 훌륭한 선교의 hub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가슴 설레는 꿈입니다. 이제 생각이 들었는데 이것을 놓고 그동안 기도를 하는데 그 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끼며,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을 주시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시대가 점점 어렵게 발전해 간다고 해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꿈이 있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역류해 갈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습니다. 문제는 꿈이 없는 것이겠지요. 성경에도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은 익숙해져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풍랑을 만나도 풍랑속을 잘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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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
    아름다운교회 Jun 05.2022 장점과 단점, 무엇을 볼 것인가?
    어느 신문사에서 어떤 분이 옷을 입을 것을 놓고서 정 반대의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한쪽에선 그 옷은 한국에서 안파는 것이어서 특혜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선 정상적으로 유통된 것이라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다같이 취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두고서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짧은 생각으로 얻은 결론은 서로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방향이 설정되면 진실은 너무나 쉽게 가려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0 눈에는 0만 보인다’는 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보고 싶은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런 편향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어떨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개인의 성격 이나 삶의 성향이나 배경등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받은 ‘한 형제요 자매’ ‘한 몸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몸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심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중심으로 사지 백체가 있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몸은 하나이지만 다양성이 있는 반면에 ‘상호성’이 있습니다. 각각의 다름이 하나됨을 방해하지 않고 서로 합하여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삼위일체의 신비처럼 신비한 연합입니다. 다른 듯 하지만 같고, 하나인 듯 하지만 여럿이고, 혼자 하는 것 같지만 같이하는 이 여러 비밀들이 작동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싫은 사람의 단점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눈에 콩깍지가 씌여서 장점만 보입니다. 이것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장점’을 볼수 있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내재합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단점이 아니라 바로 ‘장점’입니다. 사람은 ‘단점’으로 일하지 않고 ‘장점’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천재는 머리가 명석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도 수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한 가지 때문에 인정을 받습니다. 그동안 실패한 것이 많으니 너는안돼! 이것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 가운데 빛나는 한 가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손에게 다리 역할을 못한다고 잘라버릴 수 없습니다. 다리에게 손역을 잘 못한다고 비난해서도 안됩니다.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역시 장점도 있는 법이지요. 단점 때문에 미움이 더 커지게 보일 때, 장점으로 덮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다 할 수 있다면 아무나 감동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면, 내가 ‘포행자요, 핍박자요,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보면 남의 단점이 보일 수 없습니다. 내 단점보다 남의 단점이 더 크게 보이면 우리는 가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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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
    아름다운교회 May 29.2022 무엇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가?
    목회를 하면서 받은 사랑과 혜택이 참으로 과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사랑과 섬김을 받을 때엔 부끄럽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혼자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에 누구 하나 없이는 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섬김과 사랑을 귀히 받으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오랜 기간을 목회하다가 보니 가끔은 우리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의 세미나 혹은 목회자 모임등에서 위로와 격려, 배움과 깨달을 많이 얻기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세미나와 교육훈련들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감동이 남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그 모임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교회나 기관에서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 때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오시는 손님맞이하는 것이 격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러 호텔에 들어갔는데 그 방에 이름이 쓰인 메모지에 환영인사를 적어서 두고, 꽃을 꽂아 두었습니다. 방에서 마실 음료수와 선물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썼다니, 고개가 숙여지고 이 행사를 준비한 분들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절로 올라옵니다. 음식을 해도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고급호텔의 식탁세팅과 비교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 자체였습니다. 다 돈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의 재능을 살려서 준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serving하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마치 주인을 섬기는 종들처럼 공손하고 훌륭한 매너를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시간이 남아도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의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등등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휴가까지 내면서 오시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이 절로 올라옵니다. 많은 모임을 가보고, 수많은 접대를 받아보아도 형식적으로 대접하는 것과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냥 밥만 먹고 가고, 잘 쉬었다 가면되지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수준에서 맞도록 거기까지만 해도 되는데 뭐 더 나가냐는 사람의 시선도 읽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임은 감동이 없습니다. 왜냐면 말은 안해도 그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초청해서 행사를 치룬 ‘북미주 학사장교 목회자 켠퍼런스’는 어했을까요 나름대로 정성으로 잘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이 섬김의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제가 깜짝 놀랄만큼 우리 교우들의 사랑과 섬김의 마음이 큰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 목회자들은 서로 처음 보는 분들입니다. 오랜 친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와서 머무는 짧은 기간동안 이구동성으로 칭찬과 감동과 사랑 그리고 부러움이 가득 담긴 은혜가 넘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하나같이 그 사랑과 정성의 그림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은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감동,그 자체였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돌아가시는 분들의 마음에는 따뜻한 생기가 돌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만큼 우리 성도님들 한분 한분의 정성과 사랑이 컸습니다. 감동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에 감동은 없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은혜로 감당할 때 감동이 옵니다. 이번 모임이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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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9
    아름다운교회 May 22.2022 능력의 발전소
    기쁨이 사라진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 혹은 가정 생활은 행복이 아니라 고역입니다. 억지 웃음을 지어야 하고,행복하지도 않은데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내 속 은 그렇지 않은데 그래야 하는 것들은 정말 고역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 생활 혹은 직장생활은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냐면 내게는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돈받고 일을 하니 좋아도 하고,싫어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 혹은 신 앙생활은 돈을 받고 하지 않고 돈을 내며 합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감사, 선교, 건축등의 이유로 우리는 헌신을 합니다. 자기 돈을 내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면 주인노릇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저 돈내고 죽도록 충성하는데도 이 땅에서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 나라와 주님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데가 없습니다. 자기 돈내고, 죽도록 일하고, 칭찬도 못받는데도 마음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가 알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알게해 주셔서 그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니다. 이것을 모르면 짜증이 나고,손해의식 혹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신앙생활하려면 이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고역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헌신이 고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으로 시작했다가 고역으로 끝나게 되는 것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결국 이 고갈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물론 다른 환경이나 사람이 나를 시험들게 만들어 그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도 나의 문제입니다. 바다는 물을 가려받지 않습니다. 오염된 물이든 깨끗한 물이든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도 바다는 병들지 않습니다. 충분히 담을 그릇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이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은혜의 그릇’이 크고 넓으면 됩니다. 강이나 바다가 그렇게 오염된 것들을 받아들여도 병들지 않는 것은 ‘자정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정능력을 키우는 것은 잔잔할 때가 아닙니다. 폭풍과 같이 노도광풍이 불어서 강바닥,바다 바닥을 뒤흔들 때라고 힙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의 노도광풍과 같은 것들이 휘몰아 칠 때에는 그것은 우리로 자정능력을 키워주는 은혜의 방편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의 인격을 갈고 닦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곧잘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그것을 일으키는 힘, 그것은 전기를 발전하는 힘인데 우리는 그 힘이 ‘말씀과 기도’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능력의 발전소입니다. 능력의 발전소가 고갈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라지고 기도가 사라진다는 것은 발전하는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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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15.2022 죄가 반드시 가는 곳
    20년 동안 도박에 중독되어 지독한 어려움과 아픔을 겪던 어느 형제가 기적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를 믿게 되면서 하루 아침에 도박중독을 끊어내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어 사는 그 동안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이 마를 낳이 없이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몇 년간의 꿈과 같은 은혜의 시간을 보내고 지난 팬데믹 기간동안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성도들과의 교제도 소원해지면서 점차 무료함을 느끼던중 우연히 딱 한번 카지노를 지나가다가 재미삼아 게임을 했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지요? 그때부터 끊었던 도박에 대한 양수가 살아나면서 그냥 재미로, 이번만 하는 순간에 상당한 돈을 잃어버리고 정신이 바짝 들어보니 '지금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저는 도박의 도시에 살면서 이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카지노에 가서 돈을 따는 순간 망하는 길로 들어섭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아채리고 처음 카지노 가는 사람을 신기하게 알아차리고 돈을 따게 해줍니다. 그러니 돈을 따서 돈 맛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돈을 따는 줄알고 카지노 출입하다가 결국에는 망합니다. 그래서 돈을 따면 정말 안됩니다.' 내 경험을 보면 그렇더라구요. 돈을 따니까 계속 딸줄 알고 자꾸만 카지노에 출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돈을 잃는 것이 차라리 은혜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돈을 잃어도 더 카지노에 매인다고 합니다. 돈을 잃으면 오기가 생겨서 잃은 돈을 만회하고 싶은 욕심이 나기 떄문에 돈을 잃어도 카지노에 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돈을 따노 문제, 잃어도 문제인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예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여다 보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의 근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망하고 나서야 끝을 보게 되는것이 도박 중독입니다.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죄성,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성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근분은 욕심/탐욕입니다. 그 욕심이 우리안에 본성과 연합하는 순간 죄의 씨앗이 되고맙니다. 일단 죄의 씨앗이 심겨지면 놀랍게도 그것은 자랍니다. 그냥 묻혀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욕심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더 자랍니다. 그리고 죄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그 죄가 가리키는 방향은 결국은 '죽음/사망'입니다. 옛말에도 '바는 도둑이 소도둑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안에서 욕심은 죄를 향하고, 죄가 결국에 맺는 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초기 단계에서 우리가 잘 정리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한번 드러내면 우리 주변의 온갖 스마트 기계들이 나의 욕구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부지런히 끌어다가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더욱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여 결국에 사망으로 끝냅니다. 우리는 은혜의 자녀들입니다. 이겨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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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7
    아름다운교회 May 08.2022 십자가는 가정의 중심
    오늘은 미국에서는 Mothers day이지만,교회력으로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현대 사회가 핵가족 중심으로 변화되면서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가족 중심으로 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 들어선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가족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작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가치 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의 첫 번째 가치도 가정중심의 활동이 주를 이루는 것도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기도 합니다. 더더구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가족은 더더욱 핵심 가치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다가 보니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깊은 곳에서는 어느 새 가족에 모든 것을 올인하는 경향이 짙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Russell Moore목사님은 그의 책 ‘폭풍속의 가정’에서 가족 우상화’라는 단어로 기존 가치관에 풍파를 만들었습니다. 그 분의 논리는 가족 (가정) 이 정말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을 우선시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을 음미해 보면 어떤 때는 정말 우리가 가족을 우상화하고 절대 가치를 부여함으로 어느 것도 비집고 들어올 강력한 요새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가족이라는 가치는 정말 중요합니다. 부모됨도,자녀됨도,형제 자매됨 그리고 인간의 기초 사회생활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가정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부부는 부부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리고 부모와 자녀간에도 엄청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우 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역기능 가정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시작했던 가정이 바로이 역기능의 가정을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인간의 행복한, 가정에 일어난 것들은 견제와 비방 그리고 살인과 폭력등이 사라지지 않고 인류의 가정을 위협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떠난 가정의 모습입니다.가정은 행복의 원천이자,아픔의 장소입니다.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가정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간에 갈등의 연속입니다. 자녀들의 탈선에 가슴을 새하얗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부모 때문에 평생 가슴에 멍을 지고 살아가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더 큰 아픔은 그것들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드러내야 치유가 가능한데,드러내는 순간에 우리는 천박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함부러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이혼과 불신,온갖 불편한 일들이 가정안에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처럼 웃어야 하는 웃픈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Moor목사님의 말대로 가정은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아픔의 장소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장소이지만,형벌과 고통이 따르는 아픔의 장소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그래서 십자가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바라보아야 하고,십자가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 주장이 지금까지 사회 심리학적 방법으로 가정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보다 신선해 보입니다. 복음은 이것들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비록 우리의 성향들이 방해를 해도 복음을 깨달은만큼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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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6
    아름다운교회 May 01.2022 보이지 않는 손
    미국에 살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집을 비운 적이 처음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흩어져 살면서 이번에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이고 방문하는 시간을 가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힐링’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가족됨의 뿌듯함과 만남의 소중함,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 깊은 감동과 은혜가 있음을 배우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었던 터라, 첫 방문지를 마치고 일부러 렌터카를 해서 6-7시간 운전을 하면서 광활한 미국 대륙을 지나 보려고 했습니다. 역사책에서만 보던 미시시피 강을 건너보기도 하면서 미국의 대 자연의 멋을 느껴보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interesting spot을 가보지도 못하고 냅다 달려가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자연도 신비하고 아름다웠지만,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은 모든 공간들,그 공간들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나름 유명한 곳도 있었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신비롭기도 한 여러 자연과 조형물들,그것이 사람이 만들었든,자연의 혜택이든지 정말 가볼만한 곳은 수없이 많이 펼쳐져있었습니다. 긴 운전을 하는동안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언덕 사이를 헤치며 달리는 눈에 들어온 벌판은 가끔씩 비가 그친 틈새를 타고 수줍은 듯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아무래도 땅이 넓어서인지 넓은 광야에 그림같은 농경지와 주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와,아름답다!’ 감탄을 하면서 지나가거나 방문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멋진 광경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부가 이른 봄에 씨앗을 뿌렸고, 공을 들여서 여기까지 가꾸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이면에는 농부의 피땀이 고여든 아름다움이었던 것이지요 우린 그것을 모르고 보이는 결과만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건축물도 그렇습니다. 시카고에 파리의 세느강변에 비할 수 없는 멋진 장면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했지만,그 역시 그렇게 만들기 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고와 땀이 만들어 낸 것이지요. 그런 손길이 없었다면 그 아름다움을 우리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우리는 누립니다. 그러나 누림의 그 이면에는 뿌림과 수고와 눈물이라는 것이 배어져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 인생이 거친 수고의 떡을 먹기도 하지만 누리면서 드는 생각은 그 누림의 뒤에 바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만 따먹지만 열매가 맺기까지 일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느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합니까? 그것을 때론 자녀들이 몰라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의 수고로운 손길이 부모를 돌보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 모든 는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 뒤에는 보이지 않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우리의 삶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일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우리는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돌아보는 5월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의 자녀,평생 한 방향으로 함께 걸어준 부부,일평생을 희생해준 부모님,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지탱하게 한 힘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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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5
    아름다운교회 Apr 24.2022 구원의 확신
    이번주 내내 구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숙희 집사님의 죽음을 보면서 구원 받은자와 구원받지 못한자,택함을 받은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자의 마지막 삶의 끝자락들을 그려 보았습니다.누가복음 23장 말씀에서 “해골이라 하는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두 행악자중 한사람은 예수를 비방했고,한사람은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서 행악자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할때 낙원 (천국)에 있을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번주 월요일에 천국에 입성한 박숙희 집사님의 마지막 날을 들으며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년동안 그분을 가끔씩 교회에서 뵈었지만,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시는것 같이 보이지 않는것 같다고 (감히)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암에 걸려서 고통속에 계시면서도 이제는 아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아버지집에 가서 너무 좋다고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심방 가실때 마다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믿음과 구원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여질까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습니다.예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다 사하여 주심을 믿기만 하면,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입성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숙희 집사님의 돌아가신날의 모습을 우리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아닌,환하고 고와서 너무 아름다우셨습니다. 어린애기 같이 고운피부로 평안히 주무시는듯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목자방에 올려 주신 글에서 발췌 했습니다.)좋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확신과 소망의 닻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구원의 확신을 가집시다. 요한복음 1:12절 영점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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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4
    아름다운교회 Apr 17.2022 부활의 증인
    죽은 이가 살아났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내 눈앞에서 분명히 죽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데 그가 살아났다? 이것처럼 기적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그 부활을 증언하려고 하지만 부활을 어떻게 증명해 낼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상상불가한 모습으로 싹이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것을 어떻게 설명가능하다고 여기겠습니까? 자라게 하는 원인도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데,심지어 보이지 않는,아니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을 어떻게 세상의 과학과 말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적은 그냥 기적일 뿐입니다. 그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입니다. 각종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고,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계가 그분의 말씀에 복종했으며,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그 분이 단순한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위하여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신비하고도 놀라운 기적중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이후,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이 부활의 증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온통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전도 또한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중심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것의 증인이 되라고 주님은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은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증인’ 즉 Witness가 있어야 합니다. 목격을 해야만 합니다. 목격하지 않았다면 믿음으로라도 목격이 가능합니다. 믿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확한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분명히 전할 수 있습니다. 확신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00년전 갈보리 산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히 11:3). 믿음으로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본 것보다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아야 보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보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진 부활 의 증인들입니다. 세상에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직도 우리에게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 우리보다 더 못나서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진 이유는 바로 부활증인으로서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부활의 주인이십니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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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3
    아름다운교회 Apr 10.2022 김치가 살았어요?!
    김치가 살았다는 말을 하려면 김치가 생명체여야 하는데,김치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김치가 살아있다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김치를 담그려면 먼저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여러 시간을 소금을 뿌려서 소금물에 담가 놓으면 배추가 흐늘 흐늘 숨이 죽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도 ‘죽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소금과 소금물 속에서 이미 ‘죽었어야 할’ 배추가 소금기를 씻어내는 과정에서 그만 어떤 배춧잎이 빳빳하게 서 있는 것을 가끔씩 보게 됩니다. 아니면 이미 양념까지 묻혀져서 단지에 들어간 배춧잎이 빨간 양념 옷을 입었으면서도 죽은 상태로 버무려있지 않고 그 역시 뻣빳하게 기세 등등한 모습을 보이는 배춧잎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김치는 죽어야 맛이 있습니다. 그렇게 뻣빳하게 서있는 것은 김치 특유의 맛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배추,즉 절여지지 않은 배추는 김치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맛이 없는 배추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절여진 배추가 자신이 소금으로 절여져 (죽어서) 배추의 맛도 아니고, 양념의 맛도 아닌 ‘김치’의 환상적인 맛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숙성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이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설명불가능할 정도의 맛있는 고차원의 음식으로 바뀝니다. 숙성이라는 말은 익는다는 말입니다. 이 ‘숙성(熟成)’이라는 말을 뒤집어 놓고 보면 성숙(成熱)'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익었다,온전해졌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린애가 되어간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좀 더 어른스러워지고 인생의 생각과 마음의 깊이가 넓고 깊어져야 합니다. 무르익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헛된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숙은 그냥 세월이 지나서 나이가 먹는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생각의 깊이와 마음의 넓이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그릇 이상을 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인생을 꿈꾸려면 배워야 합니다. 부지런히 부단히 배워야 합니다. 이 배움은 내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남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몰랐던 것,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혜가 남의 삶과 지혜에서 번득이는 것을 보게되고 그것을 우리는 내 것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수요 영성훈련을 통해서 배웁니다. 정말 많이 배우게 됩니다. 그 배움을 하찮고 귀찮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나 고상해서 기도로만,성령으로만 성숙하려고 합니다. 영성파입니다. 특별한 은혜를 가진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매우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위험성이 늘 상존합니다. 말씀을 중시하기도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모두가 한계가 있습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숙을 향한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삶의 경험이든,책을 통한 남의 경험에서든,기도와 말씀을 통해서든 우 리는 숙성되어야 합니다. 익어야 합니다. 익지 않고 살아있는 배춧잎처럼 벌떡 일어서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면 맛도,모양도,역할도 하지 못하고 입에서 맴돌다가 쓰레기 통에 던져집니다. 이왕 죽으려면 숙성되어야 합니다. 성숙을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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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2
    아름다운교회 Apr 03.2022 말의 권세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고등의 언어,의사전달 체계를 완전하게 구사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한 존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을까요? 그 언어체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을 때,하나님은 그 언어를 혼미하게 하십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인간은 언어를 이용해서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과 대적하는 곳에 사용하려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이 아닌 언어의 혼란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셨을 정도이니까요. 인간이 사용하는 수많은 도구중에서 언어라는 도구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지만 ‘힘(능력)이 있습니다. 상황 바꾸기도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옛 말에도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칼이 글보다 강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이치이지만, 칼은 글에 의해서 설득당해서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글은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품위있게도 하고,비천하게도 합니다.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권세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롭게 하소서라는 방송에서 어느 집사님이 울면서 고백하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집사님의 아버지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갑작스런 사형선고앞에서 아버지가 의사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요?’ 의사는 차가운 말로 사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6개월’ 이 말대로 그 아버지는 6개월이 되는 날 돌아가셨답니다. 이 집사님이 울부짖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그래 의학적으로 6개월이라고 하더라도,환자에게 한번 해보자,노력해보자’라고 소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단지 3음절,6개월! 이 말을 하는데는 3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말한대로 아버지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6개월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의사가 10초만 할애해서 희망을 말해주었다고 하면 아버지는 그 희망을 따라서 노력해보다가 6개월은 더 살지 않았겠느냐는 절규였습니다. 그 이후에 이 집사님은 사람들의 외로움과 절망을 치유해주는 마음치유사로 삶의 방향을 전환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 간증을 들으며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의 권세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생명을 다른 이에게도 나누는 것입니다. 그 말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이고,함께 해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찾아 ‘물을 달라, 젖을 달라’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그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말, 헤치는 말,비판하는 말,험담하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원해야 하는데 하고나면 불편한 마음이 남습니다. 왜냐면 해서는 안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듣는대로 행하시겠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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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1
    아름다운교회 Mar 27.2022 착시현상
    페북에서 신기한 영상이 올라와 눈여겨 보았습니다. 분명히 평지인 땅바닥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쓱쓱 그림을 그리는데 깊은 계곡 사이에 징검 다리 같은 다리를 그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 그렸는지 정말 잘못 디디면 수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평면입니다. 벽에 큰 독수리를 그려놓았는데 각이 진 면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려놓으니 금방이라도 새가 날아 오를 것만 같은 입체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평면입니다. 너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일까요,우리의 눈 이렇게 쉽게 착시 현상을 일으켜 실체처럼 보이는 것일까요?이러한 착시현상은 단지 그림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런 착시가 아주 중요하게 작동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생 가치관’이 바로 그 중의 하나입니다. 가치관이란 사물을 어떤 가치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중요하고,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과 투자를 높게 결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저 마다 삶의 경험과 배움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세상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살게 되는데,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치가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될 수 있지만,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이땅의 삶만 살고 가지 않기 때문에 영생의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보고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보면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라고 조통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반대입니다. 우리가 부유한 자입니다. 돈이 있어서 부유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런 세상적인 것은 없어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면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잃고 모든 것을 얻으면 무엇이 유익하느냐’고 하십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소중한 것을 누리며 살아도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가치관이 ‘착시현상’으로 인해 잠시 그렇지 않게 보일 뿐입니다. 바울 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뼈를 깎는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가치를 깨닫게 하시고,할 마음을 주시고,할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것을 막는 우리 육체의 의지를 꺾어야 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착시를 걷어내고 진짜인 것을 붙잡아야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 착시를 모르기 때문이고,자기와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기대하고,성령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 전력질주하고나면 창공에서는 여유로운 항해를 즐기는 것처럼 그 영광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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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0.2022 책 읽기
    어려서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좋은 습관이 있다면,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뭐 이런 부지런함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좋은 습관/유산은 '책읽이'입니다. 학창 시절, 신문들 읽고, 일기를 쓰고, 시를 쓰는 일에는 웬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부족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린 자녀들도 휴대폰이나 태블릿을 가지고 있는지라 어떻게 보면 책을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을 것입니다. 책장 넘기기 보다는 화면 넘기기가 더 익숙해진 아이들입니다. 누구나 자기 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인터넷이든, 책이든, 경험이든 모든 것을이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책읽기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진 세계에 그려진 풍성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가 담긴 것들이 많기 때문 입니다.우리 교회가 팬데믹 기간동안 수요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편안함 속에 묻혀있을 수 없어서 책읽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제한되고 편협한 세계를 위인들의 생각을 빌려서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수요예배를 영성훈련의 시간으로 삼아 여러 저자들의 저서들을 섭렵해가며 우리의 영성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책을 구입하려면 '투자'를 해야 하는데 우리 교우들이 자신의 돈을 들여서 책을 읽자면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다행스럽게 CRC교단에서 제공하는 'Just Show Up'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책을 읽고 나누는 공동체가 있을 경우 무료로 책을 제공해 주고 있었습니다. 공짜잖아요! 그래서 얼른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막상 수요훈련식나에 등장하는 분들이 10여분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책읽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돈을 주면서 책을 읽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돈이 많아서 돈 쓸데가 없어서 그런 곳에 투자하는 사람일까여? 무었인가 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의 영혼에 빛을 주고자하는 선한 마음에서 출발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까지 책을 사다가 바치는데도 책을 읽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것은 우리 현대인의 심각한 질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벌써 3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얻은 유익이 있다면, 저나름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책 속에서 흘러나오는 저자들의 지혜로운 시간에 감탄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일정한 시각과 틀에 갇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구나.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 책읽기는 내가 가진 제한된 시각을 깨우쳐 주고, 나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이 깨달은 지혜를 통해서 우리도 점점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각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것이 최고라는 교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울 것도 없고, 배우고 싶지도 않고, 그냥 편하게 살면된다는 생각, 그러니 '나 그냥, 내버려둬'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가까이 대해보십시다. 성경이든, 영성책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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