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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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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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27.2023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어느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고기를 잡는 배의 선장을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교회에도 충성스럽게 봉사하며, 장로로 피택을 받았고, 임직을 앞두었는데도 교회의 덕을 위하여 임직을 차마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임직일을 일주일 앞두고 생업인 고기잡는 일을 위하여 배를 띄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직원들 월급도 주고, 사업과 가계를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를 한번 띄우면 한달정도 바다에 나가야 합니다. 임직식을 일주일 앞두고 고민이 되었습니다.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 생업에 지장이 없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고 어려움을 감수하고 임직식을 위하여 배를 띄우지 말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직식보다는 생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하고 고민 끝에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깃배에 딸린 식구들이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을 바다에 있으면서 고기를 잡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아직 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려면 몇 주를 더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말이 되자 갑자기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세차면 고기잡이를 할 수가 없고, 2-3일을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아직 고기를 더 잡아야 수익을 올릴 수 있기에 2-3일 더 기다렸다가 고기를 더 잡느냐, 아니면 여기서 포기하고, 손해가 많이 나지만 항구로 복귀하느냐 갈등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이렇게 바람을 불어 고기를 못잡게 하는데, 그래도 고집하고 임직보다는 고기잡는 것이 더 중요하냐? 지금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은 너로 하여금 돌아가서 임직을 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라는 마음이 강하게 몰아치게 되었습니다. 망설이다가, '그래, 그냥 돌아가자. 하나님께 순종하자' 그러고서 고기 잡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와 임직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속이 쓰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 보니,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깃 값이 평상시보다 몇 배나 올라서, 배를 채우지는 못했지만, 가격이 올라서 만선같은 효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부터 장로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를 믿게 되었습니다.이런 간증을 들으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인생은 내가 운영하는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운영하고 계십니다. 잠언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잠 16:9). 우리는 이익 앞에 수없이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조금만 손해를 보면 화가나고, 미워하고, 삶의 껍질을 쉽게 깨버리는 존재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생활을 위하여 자신의 삶의 불편함을 감수하지도 않습니다. 섬기며 사는 삶은 언제든 불편이 따라올 수 밖에 없습니다. 손해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은혜의 길을 걸으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채워주시는 것을 수없이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방법은 사람이 헤아리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통해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를 세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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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ug 20.2023 하나님의 뜻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 창립 이래, 아주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역사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 날입니다. 그것은 제2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 공동의회를 갖는 일이 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설립되어 15년이라는 시간을 흐르는 동안 처음으로 담임 목사를 청빙하는 날입니다. 많은 교회가 담임목사가 자주 바뀌는 세태앞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어서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저는 70세가 정년인 은퇴일정을 4년 앞당겨 2025년에 하기를 결정할 때에 적지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미래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는 일, 그동안 건강을 해칠 정도로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기에 후회는 없지만, 점점 어려워지는 건강에 대한 부담, 은퇴 이후에 맞닥트려야 할 경제적 난관, 이러한 것들을 뒤로 하고 조기 은퇴라는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오로지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나이가 차도록 자리를 지키기 보다는 교회가 새로운 활기를 찾고, 지속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부흥의 열정을 살려내기 위하여 ‘세대교체’가 답이라고 믿었고,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심의 결정을 성도들이 알아주지 못할 때 서운함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길을 뒤돌아보지 않고 걸으려 합니다. 지난 수개월동안 우리는 제2대 담임목사님을 찾기 위해서 참 많은 기도와 노력 을 기울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오늘 청빙투표를 하기까지 정말 하나님의 강력한 섭리와 은혜가 있었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빙위원들이 투표를 한 것은 딱 한번 뿐이었습니다. 처음 5명으로 압축할 때외에는 투표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오늘 공동의회에 한분의 목사님을 제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지 않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었습니다..  사실 여러 번의 투표를 거쳐야 했는데,우리의 투표를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막으셨다고 저는 보여집니다. 5명에서 한분으로 오기까지 한 사람,한 사람,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사양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한 분만 남게되는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5분으로 시작한 청빙 절차에서 각자가 결정할 시간이 이르기도 전, 우리의 선택을 하기도 전에 한 분으로 정리가 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바로 그 분을 오늘 공동의회 앞에 내 놓고,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또한 하나로 묶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 길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미래, 제 자신의 건강상태, 시대가 요청하는 사역을 향한 주님의 열망이 어우러져 이제 교회는 새로운 길로 가는 첫 단추를 아름답게 끼울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했습니다. 동사목회가 가능할까? 이런 조건에 후임 목사님을 잘 청빙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염려로 시작한 걸음이었지만,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의 구름이 벗겨지고, 새로운 미래의 길을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며, 우리 성도님들의 성숙한 자세로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해 나가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는 순종하는 일만 남은 셈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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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2
    아름다운교회 Aug 13.2023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아주 오래 전에 자동차 한 대가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차를 본 순간, 누구나가 로망을 가지고 있듯이, 나중에 여건이 되면 그 차를 갖고 싶다는 염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을 잊고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운전을 하다가 바로 제 앞에 그동안 마음에 두었던 ‘그 차’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감탄이 나오려고 하는 순간에 제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저 차가 왜 저렇게 후졌지? 내가 왜 저 차를 좋아했었지?’ 뭐 이런 생각입니다. 나중에 형편과 가회가 되면 갖고 싶다는 그 꿈의 차가, 10여년이 지난 지금 보니 왜 그렇게 촌스럽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것인지 제 자신이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아, 세상의 것이 이렇게 변하는 것이구나! 모든 것이 변하는구나! 맞지 않습니까? 몇 년에 한번씩은 고국을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회가 닿는대로 그동안 '고향의 맛’을 추억삼아 음식을 먹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먹던 그 맛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 어렸을 때에, 아니면 한국에 서 살 때에 그렇게 맛있던 그 맛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그 맛이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내 입맛이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변한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음식 뿐이겠습니까? 의복은 어떠 합니까? 몇 년만 지나면 유행이 지나서 입기가 민망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비싸게 준 옷들도 전혀 낡아지지 않았는데도 유행에서 벗어난 이유로 장롱에 모셔둔 것들이 어찌 한 둘입니까? 세상의 과학과 진리는 어떠합니까? 과거 에 옳았던 것들이 오늘에는 틀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과학을 가지고 예화를 든 적이 있었는데, 그 설교를 들은 교회의 젊은 과학자 한 분이 ‘목사님,그 이론이 이미 오래되어서 잘 사용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라고 하는 바람에 얼굴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습니다. 학문도 바뀝니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유행하는 옷처럼 바뀝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기대살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롬12:1-2). 이말을 영어 성경에서 ‘the pattern of this world’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고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변적인 세상의 풍조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방언말하기를 원하지만,무엇보다도 더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예언해 주는 점쟁이 되라는 말인가요? 여기서 예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미래를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그 말씀을 밝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 을 받아 은사를 사모하는 것도 좋지만,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성경적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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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1
    아름다운교회 Aug 06.2023 공동의회를 앞두고...
    이제 2제2대 담임목사 청빙절차가 막바지 마무리에 들어서, 우리는 2주후에 그동안 기도하며 기다려왔던 후임 담임 목사 청빙에 대한 공동의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청빙위원들이 면밀하게 검토하고 검증하며 기도하면서 이제 마지막 한분을 공동의외에 제시하여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후보 목사님이 면접중에 '제가 기 됴회 청빙에 지원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15년이 되도록 목회자가 바뀌지 않고 이제야 두번째 목사님을 청빙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닿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해석됩니다. 이민 교회의 현실 속에서 목회자 청빙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면서 숱한 목회자들의 자의반 타의 반으로 물러나는 것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상관없습니다. 그 누구의 잘못이든 목회자가 비번하게 바뀐다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다른 한 가지 의미는 첫 번째를 역으로 해석해볼 때, 우리 교회가 수많은 풍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로서 존재해 왔다는 자부심입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아름다운 교회를 거쳐 갔습니다. 짧게든 길게든, 그 분들이 이 교회에 몸을 담고 있었던 시간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맡은 역할을 하고 지나갔다고 믿어집니다. 이곳이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 교회는 미래에도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이제 공동의회를 통해서 제2대 담임목사님을 모시지만, 1대 목사인 저를 두고서 많은 분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 후임목사님이 오면 1대 목사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문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에게 말씀드렸듯이 박대우 목사의 공식 은퇴일정은 2025년 3월 2일, 창립 16주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기간동안 1, 2대 목사가 아름다운 transition을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염려를 합니다. 담임목회자가 2명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든지, 갈등이 있을 것이라든지, 어려운 길을 왜 가느냐고 하시는 염려도 이해가 됩니다만, 이런 기회는 우리 모두, 1, 2대 목사와 우리 교우들이 얼마나 성숙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갈등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갈등들을 우리가 어떻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원만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승화시키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만일 여기에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에도 답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환경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과 리더들로 아름답게 빚어질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을 함꼐 나누어지는 시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기질들이 바뀌지 않아 어려움을 겪습니다. 과거의 쓴 뿌리나, 성석하지 못한 인간적 성향들이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어도 우리를 괴롭히는 '채찍'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것은, 1/2 게대가 아름답게 교체됨과 동시에, 전, 후임목사의 인겻을 다듬고, 성도들의 성숙한 공동체 구축에 대한 검증과 훈련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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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0
    아름다운교회 Jul 30.2023 씨앗이 뿌려질때...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광활합니다. 너무나도 커서,같은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기후, 토양,삶의 방식과 문화 모두가 다릅니다. 특별히 자연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사는 네바다와 캘리포니아를 다녀보면 삭막한 사막을 4시간 가량을 달려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메마른 광야입니다. 나름대로의 멋과 풍경이 있습니다만,그야말로 정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무미건조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중부나 북부지역을 다니다 보면,드넓은 평원(prairie)이 펼쳐집니다. 삭막하고 건조한 광야가 아닌,푸르른 벌판이 마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뭐 이런 유행가 가사 하나쯤 떠올림직한 멋진 풍경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그런 풍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저 푸른 초원 위에는 울창한 나무숲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저 넓고 비옥한 평원에 높다란 세코이어 나무와 같은 멋진 나무는 왜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널따란 목초지 초원만 펼쳐져 있을까? 그런 나무들이 심겨진다면 엄청나게 크고 멋있게 자랄 수 있을텐데....’ 그런 의구심으로 초원을 바라보다가,어느 지역에 들어서면서는 가끔씩 여기 저기에 나무 숲의 군락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아니,저긴 이런 나무들이 있잖아,그런데 왜 저곳은 변변한 나무 한 그루도 없는 초원뿐일까?’ 여러 생각이 오가다가,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나름대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큰 나무가 심겨진 곳에는 그 나무를 중심으로 씨앗이 퍼져 나무의 군락을 이루었을 것이야. 그런데 다른 곳에는 그런 나무가 없는 것은 그곳에 단 한그루의 나무도 심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나무들이 없을거야’ 뭐 이런 결론인데,만일 이것이 맞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것이 너무나 크다고 믿어집니다. 만일 우리 인생이나 교회에 그런 씨앗,즉 복음이나 사명,위대한 꿈 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씨앗이 심겨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심겨졌기 때문에,그 복음이 자라서 씨를 맺고,그 씨가 퍼져서 여기저기에 복음의 숲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꿈을 꾸고,비전을 품고,그 꿈을 그려나가며 씨앗을 심었다면,그것이 마침내 열매를 맺고 씨앗이 퍼져서 그것들이 펼쳐집니다. 우리가 타는 비행기 역시,라이트 형제의 ‘실현 불가능한 작은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은 불가능 일이야’라고 포기했다면 오늘 날 우리는 비행기 타는 것을 포기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향한 꿈을 꾸었습니다. 비전을 품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시간에,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꿈을 꾸고,씨앗을 심었더니 십 수년이 지난 오늘,작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열매를 가지고 이제 다시 누군가 꿈을 꾸고,비전을 품고 나아가면,또 다른 무성한 군락지를 이루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씨는 죽은 씨앗이 아니고 살아있고,운동력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하여 위대한 꿈을 꾸며 새로운 transition이라는 바퀴를 돌리고 있습니다. 꿈을 꾸십시오. 기다리십시오. 비전의 씨앗을 심으십시오 그것이 반드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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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9
    아름다운교회 Jul 23.2023 복음에 노출된 사람
    사도행전 13장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지시하심과 더불어 소 아시아에 복음의 교두보를 놓기 위한 첫 발걸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이후에 일어난 박해를 피해 주변 디아스포라로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이방인이 중심이 되었던 만큼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결국 이 교회를 토양으로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북미주로, 북미주에서 아시아와 전 세계로 향하는 복음의 핵폭탄이 폭발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가장 효과있게 전달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모든 시초에 잘되는 출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전파의 현장에는 언제나 두 부류가 부딪혔습니다. 한 그룹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하나님께서 준비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그 복음을 막아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전파의 현장에는 언제나 이 두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첫 번째 여행을 나섰던 바나바와 바울의 일행에게 첫 번째 도전은 구브로 섬에서 서기오 바울의 회심을 방해한 바예수 (예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두번째 도전은 내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바나바의 조카 '마가'의 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비시디아 안디옥이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회심도 있었지만 적지않은 유대인들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그럼에도 이토록 어려운 복음전파를 중단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체험한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사도바울의 첫 복음설교가 나오는데,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날 복음이 복된 소식인 것은 '내가 예수를 믿었더니 이런 복을 받았다'고 해석되어집니다. 예수 믿었더니 복을 받았다. 부자가 되고,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할렐루야! 이런 류의 복음으로 우리 세대가 이해하게 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초기 복음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내 생활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이 하나님되시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이 사실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고 자신을 예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로 초대 교회가 채워졌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믿고  이런 복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고 이기심을 버리고,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날에는 예수 믿어 내게 현실적인 이득이 없으면 복음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사뭇 다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그런 일들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적은 예수님을 알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노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방사선에 노출되면 말짱할 수 없듯이, 예수님께 노출되면 변화없는 무덤덤한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예수님께 노출되어, 그분을 증거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명감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을 봅니다. 내게 유익이 현실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착각을 걷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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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8
    아름다운교회 Jul 16.2023 인사만 잘해도 부흥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가정이 어려워 공부를 할 수 없어서 겨우 중학교만 졸업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소년가장으로 일하며, 가축을 도축하며 그야말로 백정(?) 소리를 들으며 천박한 직업을 가지고 천대받고 사는 인생이었다고 합니다. 평소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인사만 잘하면 먹고는 산다. 이웃과 나눠먹으며 살아라'고 교육을 했답니다. 그래서 인사성 하나는 좋다는 평을 들으며 살았는데, 그 인사 잘하다가 예수님을 믿고, 대학나온 아가씨와 결혼하는 행운을 얻었다고 인생 이야기를 하면서, 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개척하여 '인사만 잘해도 부흥한다'는 소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쳤답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전도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도 인사를 잘하면, 동네에서도 그것이 바로 전도의 길을 여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흥미로운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좋은 도전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가끔 어른들이 푸념처럼 제게 이야기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데, 이분은 이것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나 봅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왜 인사하는 사람이 없어요? 인사성부터 고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인사를 안하고 멀뚱 멀뚱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교회안에서 당연하고 알고 지내니 얼굴 보고 미소짓는 것이 인사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도대체 그 인사가 뭐라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과 연관이 있겠습니까? 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사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잘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인사를 한다는 것,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외국 사람에게는 안그러는데, 한국 사람끼리 만나면 엘리베이터안에서도 인사 안 하고 다닙니다. 그냥 핸드폰 보는 척하고 외면합니다. 관광지에서 만나면 외국사람들에게는 인사를 잘하면서도 한국사람끼리는 원수처럼 고개를 돌립니다. 왜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자주 경험하는 것입니다. 낯설어서 그럴수도 있지만, 인사를 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열었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손을 내가 먼저 내민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관심을 얻고, 관계를 시작한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으면서 어디가서 전도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다행이도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사에게 칭찬하는 것은 '이 교회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의 마음을 북돋아주고,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은 은혜가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밝아집니다. 복음 때문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좋은 방법은 얼굴 찡그리며 할 수 없습니다. 미소를 짓고 인사를 잘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열리고, 관계가 형성이 되고, 결국 교회가 부흥하는 것까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당장 이웃에게 인사해 보십시오. 당장 옆사람에게 밝은 미소로 손잡아 보십시오. 관계가 무너졌더라도 웃으며 인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장은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인사'를 통해서 회복하게 하시고, 부흥하게 하시는 이 순박한 시도, 괜찮지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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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ul 09.2023 예수라면 어떻게 할까?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름대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옛 자아의 모습이 튀어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들에 대해서 실망하는 쓴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면 참으로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는 좋아도 교인들은 안 좋다고 말 합니다. 이런 말들은 교회가 출발하면서 얼마되지 않아 들려온 소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고민을 하는 성도들은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님이라면 과연 이 일에, 이 문제에 어떻게 하셨을까?’를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이 책은 오래 전에 Charles M. Sheldon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소설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이 성경적으로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으로서 고민을 한번쯤 해 보도록 하는 것에는 절대적인 힘이 있어 수천만 부의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런 생각없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면 이 신앙생활은 변화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출발점은 바로 성령충만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과 가르침에 절대적인 순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삶을 바치거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신앙의 가치를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진 것들이 존재하는 의미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말씀과 성령안에서 찾았습니다. 그런 모습은 바로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바로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외면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길을 절대적으로 놓지 않으려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 을 명심한다면,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할 있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이 원하는 ‘답정너’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당시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살면서 칭찬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아닌 참된 이름을 얻었습니다. 비록 우리 안의 죄성과 연결되어있는 각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에, 그 살아있어 운동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안에서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21세기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어느 목회자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삶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킬 진정한 말씀의 능력에 붙잡히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생활은 얼마나 알고 있느냐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께 순종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결단의 문제인 셈입니다. 우리가 결단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을 때, 마귀는 더욱 힘을 얻어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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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6
    아름다운교회 Jul 02.2023 주의 장막(성산)에 머물 자
    어느 목사님의 지론에 따르면< 문제가 닥칠 때에 3가지 종류의 사람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를 원망하고 분노하는 사람, 그 문제를 공감만하는 사람, 그 문제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현실과 남을 원망하거나 분노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혹자는 그 사실에 공감하며 멈춥니다. 그런데 더 나은 사람은 나타난 문제를 통해서 타산지석 (池山之石)으로 삼아, 더 좋은 길로 나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런 마음으로 교훈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갈 6:1).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다도 나아야 하는 것은 세상과 교회가 같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인 곳이기에 때론 세상과도 못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만, 항상 뒤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것이 더 나은 모습의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어떤 무당이 예수를 믿게 되면서 간증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서 들었습니 제가 가슴을 치며 들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자신이 무당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었는데 (무당의 신내림을 받는다는 것은 귀신에 사로잡혀서 귀신의 영향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통한 신내림을 받은 무당들은 뒤에서 서로를 시기하 고 질투하고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귀신은 더러운 영이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분이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에 들어 왔는데 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서 경악하게 됩니다. 귀신의 세계, 악한 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나 있을 일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이이 너무나 화가 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피나는 훈련을 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분이 지적하는 것은 교회안에서 흔히 행해지는 ‘비난과 비판, 정죄와 다툼 그리고 은근히 즐기는 뒷담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받아주며,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는 교회에서 어떻게 귀신의 세계에서나 있을 일이 교회안에 있느냐고 통렬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 행위가 바로 귀신의 장난이었구나!’ 그리고 나 스스로가 결단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자. 내 험한 입술로 인하여 귀신의 영향아래 있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아래 있음을 증명해 보자고 말입니다. 시편 15편에서 디윗은 주님의 장막에 거할 자, 주님의 성산에 이를 사람은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 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천국으로 바꿀 책임이 있 습니다. 내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들어올 때,우리는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마침내 행동에 옮겨버립니다. 들리지 않을 줄 알고, 뒤에서 수군수군댑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 성령받은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닙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짓이라 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입에 칼을 물고서라도 결심합니다. 이런 일은 절대 로 해서는 안되겠구나! 우리의 입술에 파숫간을 세워달라고 비장한 각오로 기도 해게 됩니다. 내 입술의 불신앙의 말이 교회를 허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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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5
    아름다운교회 Jun 25.2023 Freedom is not free
    오늘은 대한민국에서 73년전에 6.25 한국전쟁이 있던 날입니다. 1950년, 북한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순식간에 부산지역을 뺀 온 국토가 북한 공산당 정권에 넘어갔던 위기가 있었습니다. 1945년 8월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우리 나라는 일본의 찬탈에 온 나라가 거덜나고, 가난의 꼬리를 물려받은데 이어 불과 해방의 기쁨은 잠시 5년만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가 草根 木皮 (초근목피) 가 먹을 것이 되어버린 지독한 불행을 겪어야 했으니, 나라의 불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우리 민족은 배고픈 민족에서 그 비극을 자식의 대에까지 물려주지 않으려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헌신적이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해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음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공짜로 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미국 Washington DC에 가보면 한국전쟁을 기린 공원 벽면에 ‘Freedom is not free' 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얻은 자유와 부강함은 그냥 어쩌다가 복권당첨되듯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전쟁이라는 치열한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죽음의 피를 흘렸기에 이 자유와 부강함을 맛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이름도 빛도 없이 스쳐지나간 수많은 선배들의 희생이 있었기 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됩니다. 미국에 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그것이 아닙니까? 비행기를 타보면 압니다. 우선 탑승이 있는데 노약자, 장애자와 함께 꼭 불리워지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군인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군발이’를 먼저 태우냐고 말입니다. 그만큼 사회와 국가적인 인정과 합의가 자연스럽게 문화로 정착하고, 남들이 흘린 핏값으로 우리가 평화를 유지하고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인간의 고마움이 문화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고마워할 일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사회는 고마움은 커녕 비아냥이 만연한 것을 보면 씁쓰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나라와 나라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고, 크게 어렵지 않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였음은 물론이거니와, 이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완악무도한 마귀들의 궤계 (諭計)에 맞서서 영적인 싸웠던 믿음의 선배 들과 동료들 때문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편안함과 이득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저절로 교회만 다녀오면 믿음이 쑥쑥 자라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베뢰 아 교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갑 자손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말씀이 그런가 하여 말씀을 늘 상고하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신앙의 세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저 신앙이 자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 안보고 기도안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믿음이 좋은 것에 지름 길이 없고,저절로 되는 일도 없습니 다. 믿음앞에 가까이 가기위해 자신의 뼈를 깎는 인고(忍苦)의 희생을 치루지 않고서는 그 믿음의 깊은 맛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 공짜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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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4
    아름다운교회 Jun 18.2023 믿음은 합리성이 아닙니다
    지금  캐나다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산불로 인해 대한민국의 40%에 해당하는 면적이 불에 타고, 대기의 질은 너무나 나빠서 그 영향이 미국의 동,남부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 미친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 듣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입니다. 그런데 일기도를 보면 캐나다의 어느 지역에는 제법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어려울 때에 비가 산불지역에 집중적으로 내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쓸데없이 오라는 곳은 오지 않고 엉뚱한 곳에 퍼붓는 것일까? 가만히 보니, 비가 오지 않아도 되는 아마존 정글에 비가 많이오고, 베가스 같은 메마른 지역에 비가 오라고 해도 정반대일 뿐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찌 그런 일뿐만 있겠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세대가 바뀌고, 세상의 풍조도 바뀌어, 과거의 가치관으로 현대를 살 수 없다는 인식이 우리들에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마차타고 현대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뀌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법칙 들입니다. 현대 사회는 합리적이지 않으면 배척을 하는 사회입니다. 합리적이거나 실용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신앙생활도 합리적이거나  실용적이 아니면 거부를 하는 경향이 교회안에도 들어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목회자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보니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교회들이 제법 늘었습니다. ‘과거에는 성도들이 직접 나서서 섬기고  봉사하고 직접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팬데믹 이후 요즘은 서로들 봉사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입니다. 봉사할 일이 있으면 그냥 돈으로 주고 가서 사먹거나 캐더링으로 대체하려는 현상이 이젠 자연스러울 정도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움직여야 하고, 수많은 일들을 앞장서 치루어내야 하는 목회자 입장에서는 정말 어려운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짜증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 무슨 일을 도대체 이렇게 밖에 못하세요? 좀더 쉽게, 합리적으로 하면 안됩니까?’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때면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신,구약을 다 뒤져봐도 믿음에 관해서면 합리성과 실용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어떻게 다윗이 골리앗을, 300명이 수십만을 이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12명이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Mission Impossible입니다. 설명  불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어떻게요?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 그리고 용기’라는 요소가 아주 맛있게 익은 김치처럼 잘 배합되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만일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가든 그것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Tim Keller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제자도는 파격적이고 위험을 감수한다. 왜냐면 참된 제자도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는 것이지, 자신의 직관, 계획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은 늘 예상되는 합리적인 길만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사사기, p.20).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합리성만 추구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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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3
    아름다운교회 Jun 11.2023 누구나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교회
    제가  요즘  안식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제가 목회하는 동안의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견디기 힘든 건강악화로 인해, 몸과 영혼이 탈탈 털린 것과 같은 아픔의 시간에 머물게 두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오직 예수안에 있는 관계 그리고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아무 조건도 없이 사랑으로 받아주고 위로를 해주는 수많은 손길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의 호의를 받을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내가 받은 사랑을 이제는 갚으면서 살아야 된다는 사명의식까지 갖게 됩니다.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위기에 봉착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가진 인생도 없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고슴도치처럼 가시돋힌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누군가 손을 붙잡아주고, 누군가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로 인하여 충분히 마음에 힘을 얻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는 우리의 만족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기를 이번 기회에 결심해 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사랑과 안식과 쉼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의 구성원들은 소아적으로 나의 유익을 채우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돌아보는 이타적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큰 교회를 다니다 보면 부러운 것이 그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섬기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피한방울 이해관계 하나도 없는데, 주일날 큰 웃음으로 성도들을 맞이하며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보면서 정말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 교회 오기도 힘들고, 남들을 섬길 마음은 그저 반짝 은혜받을 때뿐이고, 또 다시 나 자신이 needy person으로 남는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의 교회는 잘난 사람만 와서도 안됩니다. 평범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 힘이 없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오는 곳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나 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고, 그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가 그런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 사실은 교회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제자로 성장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나그네가 와도 아무 조건없이 ‘안식과 위로’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 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으셨듯이 그렇게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부단히 우리 자신을 말씀앞에 깨우쳐 야 합니다.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뱉는다고 하면, 그건 세상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교회가 따듯하고 위로를 받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사람을 평가하는 버릇을 고쳐야합니다. 망할 교회는 뒷담화 속에 사람을 평가하다가 망합니다. 앞에서는 거룩하고 사랑이 많고 이해심이 많은 듯 하지만, 뒤로 가면 비난하고, 비아냥대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우리들의 뒷담화가 관계를 망치고 안식을 망칩니다. 나같은 사람도 받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서로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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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2
    아름다운교회 Jun 04.2023 예배하다가 죽고 싶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죽기까지 예수님만 에베하며 살고 잎어요' 중년의 나이에야 겉신앙의 껍질을 벗어버리고,예수님을 참되게 발견하면서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삶을 이제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살던 인생을 멈추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목회의 길을 들어섰던 분의 고백입니다. 그분 안에 뿌리박힌 예수님이 내게는 어떤 분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한 마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천상의 세계에 벌어지는 몇 가지 일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가장 먼저가 ‘예배’입니다. 24장로, 천사들의 예배입니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전도도 기도도 헌신도 할 것이 없고 오직 예배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새벽에 어느 장로님이 고백했습니다. ‘차 사고로 인해 어지러운 마음에 새벽예배에 안 나오려고 했는데 아내가 죽더라도 교회가서 죽자’고 하는 바람에 새벽에 나왔다고 하시면서,새벽에 잘 나왔다고 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의 예배를 생각해 보았습 니다. 어느 권사님은 매주 LA까지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예배를 위하여 달려 나옵니다. 어느 집사님 내외는 누가 오든 안오든, 누가 보든 안 보든, 날씨가 어떻든 그렇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도 새벽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지구상 어디를 가든 예배하는 곳이 있다면, 그 어느 곳에 가든 예배부터 챙기는 분들도 있습니 다. 어떤 분은 도무지 예배할 환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있도록 온 마음을 기울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예배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기를 쓰고 예배하는 것일까요? 오랜 관습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참으로 불행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즉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예배라는 형식으로 반응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엉엉울며 감격합니다.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않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 그리고 높이를 깨달은 것을 예배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예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 다. 만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다면 자신의 구원받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찬양과 경배 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향한 사랑이 바로 예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분 정도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뭘 구하면 들어주시는 분 정도로 아는 것도 대단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기도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예배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배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뜻을 배우 게 됩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삶의 현장에 나가서 그 드러난 뜻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누구나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예배를 생명과 같이 다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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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1
    아름다운교회 May 28.2023 신앙생활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안식년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고, 그런 계획도 세운 적도 없었기에 막상 안식 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받고 보니,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당황스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참된 안식과 쉼을 통해서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영성과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이 과제로 남았습니다. 목회자에게서 쉼은 그저 육체의 쉼이 아니라, 로뎀나무 아래서 천사의 어루만짐을 받아 새 힘을 얻었던 엘리야처럼 일어나야하기 때문 입니다. 결국 나 자신과 사역을 돌아보고, 앞으로 사역과 은퇴후의 계획들을 어떻게하면 조화롭게 이룰 수 있도록 차분한 계획과 실행이 필요할 때임을 느낍니다. 우선 지난 3주간의 시간이 제게는 가장 먼저 지쳐있던 육신과 영성에 가뭄의 단비와 같은 시간이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간동안 육체적으로 쉬면서도 많은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외딴 곳, 사람들의 소리, 자동차 소리, 주변 환경의 오염된 곳에서부터 완전하게 분리하여 있는 이 기간은 영적으로 많은 회복을 가져온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독서를 통해서 받은 은혜입니다. 다행이 가지고 갔던 책중의 하나가 저와 우리 교회의 상황과 너무나 잘 맞아 떨어 졌던 탓인지 많은 도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의 key word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 청빙 위원들에게도 이 책을 정독하여 지혜와 도전을 얻도록 요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되도록 우리 모든 교우들도 이 책을 한번쯤 꼭 읽어보도록 권면합니다. 이책은 유기성 목사님의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우리 신앙생활이 왜 능력이 없는가에 관한 성찰이 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내 인생의 욕구충족’에 있기 때문이며, 결국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인데 우리 자신들에게 자기의 욕구를 배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우리가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공감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던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지 않던지(자기가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 내가 원하는 것과 달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없던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우리의 신앙 생활이 공허한 것은 머릿속으로 알고, 입으로는 고백하고 멋진 말들을 쏟아내기는 하지만, 결국 행동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뭐, 교회 안나가는 것보다는 나가는 것이 이왕이면 더 좋고, 기도  안하는 것보다는 그게  뭐든  기도하는 것이 이왕이면 더 좋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르게 하는 기도와 삶입니다. 아무리 잘 달려가도 목적과 방향이 틀려있으면 그 달음질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4:20)고 하였습니다. 말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능력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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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y 21.2023 구름은 덮어도 태양은 떠있다
    어제 새벽에는 맑은 하늘에 태양이 떠올라, 물위에 비치는 태양과 함께 두 개의 태양을 보았는데, 오늘 새벽에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작은 공간에 태양이 뜨는 것이 보이면서 물위에 긴 태양빛을 수놓은 태양을 바라보며 새벽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제가 있는 이곳에는 온통 간 밤에 온 비와 함께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새벽시간의 묵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반짝 구름이 열린 사이로 태양이 빛이 났지만 지금은 그 환한 태양이 어디에 숨었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잿빛 하늘만 보입니다. 태양이 떨어진 것일까요?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늘 어디엔가 태양은 여전히 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추의 오차도 없이 주어진 공간을 자랑스럽게 누비며 하나님의 정한 시간과 공간을 지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보이지 않지만 우주선이 지금 하늘 공간을 돌아다니듯 말입니다. 온 세상 하늘에 구름이 덮여서 태양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있다는 사실은 주변이 환하게 밝아 충분히 사물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태양마저 없다면 세상은 캄캄한 밤일 수 밖에 없겠지요. 심지어 태양이 아예 감추어진 밤에도 태양빛이 없지만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태양이 올라올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할지라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할지라도 그 밤의 원칙은 적용됩니다. 그럴 때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시련의 밤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그 문제를 다루는 삶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무익한 열매를 맺습니다. 보내는 시간을 원망과 불평 그리고 탄식과 절망으로 보냅니다.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이 자신만 축이 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지금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음(롬8:18)의 이 난이도 높은 시험을 잘 이겨나갑니다. 그렇게 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갑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훈련’ 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태양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시간을 허송세월을 하지 않고 영롱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고 지혜로움의 분기점입니다. 제 인생도 그러합니다. 온 몸을 얽매는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루말할 수 없는 영적 육적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이 시간을 훈련의 하나님의 훈련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며, 내 안에서 이룰 하나님의 섭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법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며,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언젠가 어둠과 빛을 정확하게 판단하셔서 악한 자의 악을 드러내고 심판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마른 막대기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면 위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쓸모없는 막대기에도 싹이 나게 하시는 은혜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은 오늘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임합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기도하는 자에게 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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