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박대우목사) 1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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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박대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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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25.2021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어느 딸이 엄마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엄마, 만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주세요. 그러면 제가 엄마에게 받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줄게요” 윤회설을 떠나서 딸이 엄마의 사랑을 이렇게 갚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정말 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만큼 엄마의 사랑을 깊게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랬을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주고 싶은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죽음에 내모는 비정한 엄마도 있다고 가끔 회자되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보다는 한없는 사랑을 퍼 부은 엄마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그런 사랑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일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심성에 깊이 잘 박혀있는 사랑의 모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진보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 경제, 정치, 사상, 종교, 교육, 군사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이보다 진보한 세상은 없습니다. 퇴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변질이라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그런 분야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이런 세상은 없었습니다. 시공간(時空間)적으로도 그렇지만 사상의 발전이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초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더 까칠해졌고 더 선명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목회자로서 자꾸만 제 마음에 밀려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고 변질이 가능한 세상, 우리가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앞으로 어떤 패턴으로 변하게 될지 생각해보면 두렵기가 한이 없습니다. 두 가지 현상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같습니다. Main stream은 세상이 끌고가는 방향입니다. 세상에 동조하고, 세상이 원하는 것들을 우리가 원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인기를 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방향을 ‘넓은 문’처럼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와중에서 ‘흰 옷 입은 신부’처럼 ‘남은 그루터기’가 되어서 ‘좁은 문’을 지키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향을 생각해 보면 정말 앞으로 오는 세상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남은 그루터기처럼 가지는 꺽이고, 잎은 떨어져나가서 그야말로 겨우 밑둥만 남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그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절규가까운 신음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백신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급될지라도 그 안에 여전히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코로나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두려움의 종노릇을 하는 노예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세상이 오든, 우리는 우리 안에 갖가지 종류의 두려움을 주는 세상의 간계를 파악하고 그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이 그것을 이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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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18.2021 벼락 부자, 벼락 거지, 개근 거지
    낙뢰(落雷)를 벼락이라고 합니다. 벼락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급격한 방전현상을 말하지요. 벼락맞았다. 그럽니다. 급작스러움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벼락맞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이야기입니다. 얼마전에 한국의 어느 지인과 통화를 했습니다. 요즘 부동산이 갑자가 올라서 자기 사는 집이 갑자기 ‘따따블’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부자되셨네요? 축하합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 ‘저는 좋은데 제 딸이 울상입니다. 우리 딸이 졸지에 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하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잠시 혼돈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을 한국에서는 ‘벼락 부자, 벼락 거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조어를 듣다가 보면, 이런 용어들이 사실은 좋은 용어가 아닙니다. 자조섞이거나 비하, 비판의 어조가 더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류의 신조어중에 ‘개근 거지’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에는 개근상도 줄정도로 개근이 큰 상입니다. 우등상은 못받아도 개근상은 타야합니다. 상(償)이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이런 개근은 ‘거지’같은 삶이라는 비하용어라고 합니다. 왜냐면 일년 열 두달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학교를 출석했다는 말은 성실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들은 해외여행이다, 현장실습이다 해서 일년에 몇 번씩 번지르하게 해외를 오가는데 오죽 가난하면 체험학습도 못가서 학교에만 하루도 거르지않을 정도로 ‘가난한 학생’이라는 의미가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울어야 할까요, 웃어야 할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를 성경은 뭐라고 할까요? 비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뭐, 이런 류가 아닐까 비슷하게 껴맞추어 보았습니다. ‘벼락 구원’을 받은 사람은 벼락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이 달렸던 한 강도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날벼락 맞은 사람처럼 그렇게 구원의 은총을 벼락같이 받은 사람은 그나마 나은 것이겠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열심히 믿고 있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예수님 따라다닌다고 해도 갑자기 버린 받은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 바리새인 같은 신앙인이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요? 두렵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부자가 되고, 어쩌다가 거지가 되는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모두가 공감하고, 공평한 공정은 이 세상에서는 어차피 완벽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공정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공정/공평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의 공평은 상대적이지만, 그분의 공평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공평,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세상은 자그마한 불편함과 손해에도 민감하다고 합니다. 너그러움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 중심의 시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공의와 공평’은 언제나 자기 중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공평이 기대가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병든 마음과 사회가 속히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벼락 부자/거지, 개근거지의 정의가 아닌 완벽한 하나님의 공의아래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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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11.2021 선줄로 생각하거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 세계의 지난 1년은 도둑맞은 집과 같다고 한다면 해괴한 논리일까 싶지만, 지구상 모든 나라에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으로 인해 모두가 혼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미국은 오는 19일부터는 모든 성인들이 조건없이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어느 정도 바이러스로부터 자유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예견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로 인하여 참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한창 창궐할 때에 미국은 ‘이게 선진국이냐’는 비아냥을 들으며 날마다 바이러스 확신의 신기록을 갈아치면서 위험한 국가의 오명을 쓰고 살았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K-방역’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내며 방역우수국가로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안았고, 많은 나라들이 한국의 방역을 모방하려는 일들까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오히려 걱정스러운 전화를 받기도 했고, 이곳의 사람들은 한국으로 피난(?)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전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미국이 선진국이 맞다’는 감탄사를 한국의 지인들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한국은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그야말로 ‘국민을 죄인취급하듯 때려잡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한국에 방문한 지인은 격리기간의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는 한국가기 싫다고 합니다. 인권은 방역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도 그러한 불편은 ‘이웃을 위하여 담보’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백신 개발이나 확보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세계의 강대국답게 백신개발과 확보 그리고 접종은 남들이 부러워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K방역만 자랑하고 백신확보에는 등한시하다가 백신접종으로보면 세계 최빈국에 속할 정도로 답답한 현실을 맞고 있습니다. 오직 국민들을 쥐어짜서 어기면 벌을 주는 일벌백계의 후진적 방법으로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K방역이 성공하려면 이후 백신과 함께 완성해야 하는데 방역에만 신경썼지 치료와 예방에는 게을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일한 상황판단이었지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바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조금만 나아지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신앙의 금자탑들 말입니다. 지금은 망하지 않아 보입니다. 망할 일도 없어 보입니다. 잘 돌아가고 있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잘나가던 이스라엘도 결국은 망했습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 사도의 경고를 우리는 정말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늘 ‘안심’을 강조합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위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인생을 돌아보면 서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넘어지기 쉬운 지점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배부른 포만감을 느낄 때 사고가 나기 쉽상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푯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라는 푯대라면 여기서 만족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푯대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곳을 향하여 오늘도 달려가야 합니다. 선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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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Apr 04.2021 뼛속까지 죄인인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부활의 아침입니다. 한 겨울의 추위에 말라서 얼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나뭇가지에 생명의 옷을 달기 시작하면서 봄이 왔음을 알아채갑니다. 생명은 정말 죄의 근본만큼, 아니 그보다도 끈질긴 힘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에스라 성경을 읽으면서 그토록 불순종의 죄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걸었던 이스라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백성이 죽거나 포로 잡혀가야만 했던 그 비참함을 잊어버리는데 70년은 오히려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에스라 9장에 보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불순종의 길을 걷는 것을 보면서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아 회개기도하는 에스라를 봅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작정한 그야말로 ‘뼛속까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낯이 부끄러워 견딜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이러한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의 형틀에 그 ‘뼛속까지 죄인’인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한 때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없이는 드릴 수 없는 예배와 기도 그리고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평생을 이 길을 걸어오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으로 내 죄를 용서하신 것도 큰 사랑인데, 부활하심으로 나로 부활의 영광에 동참시키신 일은 도무지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없었으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의 부활도 없고, 믿음도 헛것이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부활하시기도 하셨지만, 그 부활은 또한 나의 부활을 위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 또한 뼛속까지 죄인을 죄의 권세에서 붙잡아 놓지 못하게 하시고, 그 죄인을 다시 하늘의 영광으로 올리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은 도대체 어떤 사랑입니까? 세상의 다른 종교는 자신이 노력해야 가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업보가 있으면 그 업보를 해결해야 합니다. 자신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총, 칼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하여 억지 신앙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굴복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심으로, 자기를 버리시고, 십자가라는 수치를 당하시면서까지, 자신의 있는 모든 것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분을 따라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또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그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지한 가운데 죽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온 몸을 드러내어 ‘나 여기있다! 여기 있으니 찾아라!’ 무모한(?) 숨바꼭질을 하시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그 사랑이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에서 불타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나머지의 삶은 이제 그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이 땅에 부활의 증인으로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활증인이 되어 주님 오실 때까지 평생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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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8.2021 철새 정치인, 철새 신앙인
    한국의 어느 사관생도가 청와대의 국민청원을 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지난 주에 천안함 추모행사에 야당정치인을 참석시키지 않은 정부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는데,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장병들을 추모하는 일에 여당과 야당이 어디있느냐며, 정당을 뛰어넘어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들으며 미국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미국 군인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존경을 받는 것은 말할 것이 없고, 의료, 학업, 재정에 대해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나라도 군대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군인들을 존대하는 것을 보고 삽니다. 그들에게는 군생활이 썩은 시간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시간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정부와 국민이 철저하게 존중을 해줍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수치스러운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일은 잘못된 의식을 가진,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아니라 자기 안위와 편익을 위한 이기적 정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국가라는 거창한 말을 하지만 사실은 자기 이익에 혈안이 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표(vote)’일 뿐입니다. 표가 되는 곳으로 이동하는 철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거할 때에만 국민이 있고, 선거가 끝나면 국민은 그들을 섬겨줄 노예에 불과할 뿐입니다. 표만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합니다. 피아(彼我)가 없고, 명분과 자존감도 없습니다. 표만 되면 자기 주장도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습니다. 인생철학도 표앞에서는 아무 힘도 못씁니다. 그냥 표만 달랍니다. 국민은 섬겨야할 주인이 아니라 표만 주는 종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염치도 없습니다. 잘못했다는 사과도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줄도 모릅니다. 오직 표에만 관심있는 철새들입니다. 역겨운 정치인들이 한국과 미국에 널려있습니다. 거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철새도 있습니다. 오늘 이곳, 내일은 저곳을 기웃거리며 자신을 높여주고, 인정해주고, 편안한 신앙생활을 위해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사람들입니다. 팬더믹 시대에 우리는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핍박으로 인해 교회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그들에서부터 퍼져나갔습니다.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날 교회가 뿔뿔이 흩어졌는데 과연 더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졌을까요? 의심이 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였을 때 가장 주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였을 때 가장 나약해졌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내일부터 우리는 21년도 ‘겟세마네 특별 새벽기도회’를 엽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만져보고, 따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바라보지도, 만져보려고도 더더구나 따르려고 하지 않는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신앙 철새처럼 정함이 없이 오직 표에만 관심있는 정치인처럼, 오직 일생의 편안한 ‘복’에만 관심있는 철새 신앙인의 모습을 벗어나려면, 십자가아래서 다시 거듭나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에 된 것처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곳이 바로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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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23.2021 예배자인가, 시청자인가
    어린아이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자란다는 것의 하나는 아무래도 자기책임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 않습니다. 의존적이고, 미숙하고, 실수와 실패가 많으며, 자기통제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은 자기 삶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통제력도 큽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어른 아이가 많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성인을 넘어 장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독립도 하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는 독립하고 싶지 않을만큼 의존적 삶을 삽니다) 부모에게 얹쳐사는 경우가 코로나 팬더믹 시대에 더 늘었다는 보고도 들려옵니다. 그래서 부모는 평생 허리가 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탄도 합니다. 아마도 장수(長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생활에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비대면(Untact)시대가 되다 보니, 어느 시대보다도 자기 책임의 영역이 더욱 넓어졌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성숙한 모습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지 시험대에 선 것이 요즘 상황입니다. 어느 교회 연구 전문가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성숙한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나름대로 대처를 잘 해나가서 어려움을 잘 극복했지만, 미성숙한 교인들이 대부분인 교회는 어려움을 엄청 겪는다’는 분석이었습니다. 나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석입니다. 미성숙한 이들이 모인 교회는 우왕좌왕하다가 이 코로나 시대에 교회 해체라는 위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만, 나름대로 잘 훈련되고 성숙한 교회는 이 어려움의 시대 가운데서도 고통은 똑같이 있지만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 코로나 1년의 시기를 그냥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을 믿음의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요. 내가 비록 교회에 나가지는 못한다고 해도 나를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큰 소리를 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그 존재는 교회를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도 발견합니다.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슴아픈 부분이 이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회개도 합니다. 잔소리하는 것 같아서, 알아서 잘 하겠거니 그냥 놔두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혼이라도 내고, 보채기라도 하고, 채근이라도 할 결 그랬습니다. 잘 알아서 성장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비대면 예배를 드린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예배하는 성도들로서 누가 성숙한가, 미성숙한가를 가름하는 한 단어가 이것입니다. ‘나는 시청자인가, 예배자인가?’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며 맘에 드는 예배를 찾거나,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예배를 ‘시청’하는 사람은 자기 책임이 없는 미성숙한 사람이 아닐까요? 비록 컴퓨터나 TV앞에 서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시청자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하나님앞에 서서 예배자로 예배하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목회자로서 가슴졸이는 것은 행여나 지난 1년의 비대면 예배를 경험해 오면서 우리 성도들이 혹시나 ‘시청자’가 되어있으면 어쩌나 싶은 것입니다. 예배자입니다. 시청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숙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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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14.2021 은혜도 불평도 전염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에 큰 변화의 쓰나미를 겪은지 1년이 되어갑니다. 이번 바이러스는 그 감염력이 너무나 커서 WHO에서 Pandemic(대유행)이라는 용어를 쓸만큼 감염이 빠르고 위험합니다. 미국에서만 해도 수십만명이 사망을 했을 정도로 피해가 컸고, 이로 인하여 경제, 정치, 종교지형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패턴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중에 어떤 결론으로 이 사태를 정리하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스크 쓰기를 싫어하는 미국인들도 마스크를 쓰기 시작해서 이제는 마스크도 생활의 일부가 될만큼 자연스러워졌던 것은 ‘감염’이라는 전염병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염병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끊거나 넓혔습니다. 전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가기 전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염병(전염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살아있기에 감염(?)이 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전염력이 강했습니다. 이 복음에 노출되거나 한번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데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핵폭탄급’의 변화입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하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놀라운 힘이었기에 이것은 전염병보다더 어쩌면 더 강력한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의 전염병’에 걸릴 것을 염려했습니다. 아니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빛에 나오지 않으려했습니다. 복음의 빛에 비치면 자신의 어두움이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복음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은혜받는 것도, 불평하는 것도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받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은혜에 전염이 됩니다. 선한 일이고 선한 영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염성이 강하듯,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 역시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받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 복입니다. 그 은혜의 삶을 모방해보고 따라가다가 보면 그 은혜가 어느 덧 나의 것이 됩니다. 그러려면 부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은혜안에 거하고 싶다, 나도 기도하는 자리에 앉고 싶다, 나도 그런 분을 닮고 싶다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남의 일처럼 여기고 지나가면 전염되지 않습니다. 은혜받으려면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불평도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내 입의 불평이 있으면 어느 새 내 마음 전체로 불평이 자리잡습니다. 매사에 불평입니다. 이것도 불편해지고, 저것도 편하지 않아서 늘 불평입니다. 그런 사람 곁에 가면 나도 모르게 그 불평이 바이러스처럼 전염됩니다. 그러다 둘 다 파멸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나는 안 그래야지 하는데도 자꾸만 그래지는 것은 내 주변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목회하면서 성도들을 볼 때마다 그런 마음이 듭니다. 은혜받는 사람 곁에 다가가는 사람들은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사람들 곁에 가는 사람들은 불안해집니다. 왜냐면 은혜와 불평이 똑같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 은혜에 전염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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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Mar 07.2021 당신이 교회입니다
    오늘은 교회가 창립되어 12년을 지내온 것을 감사하는 의미있는 주일을 맞이합니다. 12년의 역사 전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립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담임목사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음을 생각할 때 감사하고 또 감사하지만, 지난 12년의 세월 가운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가슴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으로 인해서 명맥만 유지하거나 이름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교회도 있는 요즘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정말 교회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촛불을 끄지 않고 흔들거리며 켜져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변의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눈물날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유대인들은 복음 전파자들에게 악감을 품게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왔습니다(행14:2). 온갖 그럴 듯한 이유를 가지고 복음 전파자들의 복음을 흐트러트리려고 ‘악감(악한 감정)’을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 일으켜 반대를 일삼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살아있었기에 그 반대 속에서도 아름답게 복음의 꽃이 피었던 것처럼, 교회가 12년의 세월을 지켜오는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이르게 하신 것은 우리의 노력과 힘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12년전, 주변의 반대와 염려 그리고 리먼 금융사태로 인해 유래없는 극한의 어려움속에서 교회의 첫 번째 불이 켜졌습니다. 생각만 해도 뭉클한 감격스러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4년반만에 새로운 터전으로 옮기는 기적적인 역사 가운데서도 ‘망한다...’는 분들의 훼방과 온갖 종류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나름대로 역할을 하면서 복음의 산실, 은혜의 방죽의 역할을 묵묵하게 지금까지 해 오고 있었고, 코로나 시대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해 오는 특별한 은혜를 입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미소짓게 해드리는 교회’가 한동안 우리 교회의 표어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속의 똑같은 다른 교회가 아니라 세상속에서 전혀 다른 교회를 표방하면서 시작한 교회는 지금 어떤 교회입니까? 시스템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는 그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교인이 될 것이냐, 예수인이 될 것이냐, 우리의 과제입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의 변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교회로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극히 험난하고도 고통스러운 과제가 우리 앞에 남아있음을 생각할 때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목회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인 우리 자신 모두가 함께 마음을 맞추어야만 가능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교회를 거쳐간 수많은 성도들도 나름대로 자기 사역에 충실하고 가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도 감사하고, 더더욱 감사할 것은 지금까지 묵묵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헌신하는 분들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교회이기에 우리가 교회를 이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교회를 세워갈 기둥들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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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6
    아름다운교회 Feb 28.2021 쇼핑
    가끔 산에 올라가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이킹이나 등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용한 곳에 앉아서 묵상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는 것이 목적이어서 잠시 가까운 산에 올라가는 것이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시간을 위해서도 준비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여 자질 구레한 물품들을 수용한 가방을 하나 장만하여야겠기에, 전문용 등산가방이 아닌 그저 수납용 가방을 구입하였는데 사전 지식도 없었기에 그저 가장 저렴한 가방을 인터넷에서 구입을 했습니다. 20불 안팎으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그림이 보기 좋아서 구입한 등산 가방은 우선 커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것 저것 챙겨넣은 가방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지 들을 때마다 이번에는 여기서 툭~ 터지고, 다음엔 저기서 와삭~ 깨집니다. 그래서 바늘로 깁기도하고 끈으로 잡아매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형제의 소개로 전문 등산용품 가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좋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를 연발하게 되었는데 가격이 300불정도입니다. 가방하나에...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가히 넘볼 수 없는 산이어서 눈요기만 즐겁게 하고 나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싼 것을 구입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싸구려이기에 쉽게 망가지기도 하고, 쉽게 질리기도 하며, 실효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살아온 삶의 습성이 ‘싼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어려웠던 삶에서 배운 습성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그리 지혜롭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싼 것을 싸게 사는 것’ 이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비싼 것을 싸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싼 것은 누구나 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싼 것을 싸게 사는 것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도 배웠습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이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저비용을 투자해서 고효율을 내는 것이 ‘경제적’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물건은 바겐세일이 있어서 비싼 물건도 싸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는 저비용 고효율의 기회가 쉽지 않습니다. 되도록 편하게 신앙생활하면서도 은혜도 많이 받는 방법도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수지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연히 참석한 집회에 큰 은혜를 받아 평생 주님의 사람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단 한번의 기회로 인생의 전환점을 이룬 분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 한번의 기회를 위하여 얼마나 많이 주님의 인내와 기다림과 사랑과 희생이 큰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공짜는 아닙니다. ‘은혜’라 함은 ‘거저 주시는 것’ ‘공짜’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공짜는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이 없어서 공짜같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아끼지 않은 ‘희생’의 결과가 우리 입장에서는 ‘공짜’가 된 것이지요. 비싼 것을 싸게 사는 것을 누리고 싶다면 그만큼 발품을 팔아야 하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알아봐야합니다. 그러니 그것도 공짜가 아닙니다. 은혜받고 싶습니까? 발품팔아야 합니다. 공짜로 싸게 사는 법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말씀, 기도와 더불어 사모하고 발품파는 열심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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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5
    아름다운교회 Feb 21.2021 Texas 한파와 교회
    지난 한 주에는 기후의 변화로 인하여 미국이 몸살을 앓았던 주간이었습니다. 미국 본토 48개주 중에서 73%가 눈으로 덮이며 한파가 몰아쳤는데 특별히 중, 남부지역에 피해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단전, 단수가 이루어지고 사망자만 30여명에 이르고, 피해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전기가 끊기는 것은 물론, 산업용 연료와 가정용 난방까지 중단이 되면서 그 고통이 이루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환자들이 사용하는 의료용품에 제공되는 것까지 포함하면 생각지도 않은 피해가 많아 큰 고통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텍사스 주의  경우에 전기 발전량이 미국에서 1위라고 합니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등의 매장량이 미국 1위이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41%, 천연가스의 25%, 풍력 발전량의 28%가 텍사스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한파에 모두가 얼어붙어서 가장 넉넉한 자원과 인프라를 가지고 가장 혹한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고 합니다. 이러 저러한 원인분석이 지적되었지만 어느 신문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고립’입니다.  너무 풍성한 자원과 실력을 가졌기에 다른 주들과 연결이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다른 주들을 캐나다와 멕시코를 잇고, 로키 산맥을 중심으로 동, 서로 나뉘는 권역이 있는데 이 주들은 서로가 서로 전력 연결망이 형성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는 서로가 전기를 사고 팔수 있는 연결망이  형성되어 있어서 타주나 다른 나라의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텍사스 주는 자체적으로 소화가 가능하고 다른 곳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타 주로부터 들어올 전기 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100년만에 찾아온 한파로 인해서 톡톡한 댓가를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자만하다가 위기 한방에 모두가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서 교회가 성도됨의 ‘단절’이 일어났습니다. 구태여 교회에  안나가도 되는 온라인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구태여 성도의 교제를 잊어버릴   만큼의 ‘고립’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코로나가 끝나면 정상적으로  회복될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이 고립이 계속된다면 문제입니다. 텍사스의 경우처럼 재난에 대비하지 않은 자만심(?)이 불러온 불행스러운 일을 겪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로를 묶어내는 ‘성도의 교제’가 살아나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지 즐겁게 먹고 마시는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잘 엮어지고, 고난의 시기에도 그 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버팀목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한 교통은 필요가 사라지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의 교통은 영적인 성장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잠시의 유익이 아닌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코로나 시대로 인하여 이 교제의 폭이 좁아지거나  단절된 것들을 회복해야 합니다. ‘나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필요한’   연결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형제의 연합은 아론의 수염에 흐르는 기름으로 표현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관계에서 영적 고갈의  시대에 서로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연결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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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4
    아름다운교회 Feb 14.2021 수건 한 장도 그냥 보내시지 않는 하나님
    코로나의 위험이 많이 진정되어 보입니다. 위험수위가 높아질 때만해도 하루에 2000명이 넘던 확진자 숫자가 어제(13일) 통계를 보면 500명대로 낮아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많이 상황이 좋아진 듯 보입니다. 그래서 네바다 주정부에서는 50명이내 혹은 25%에서 100명이내 혹은 35%이내라는 기준이 많이 완화된 조치를 내놓았습니다.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가 싶은 희망을 품어보기도 합니다. 교회도 머지않아 정상적으로 예배를 회복하게 될 날이 가깝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사실 코로나의 거친 파도는 많은 상처를 내고서 우리 곁에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를 그나마 이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섬세하게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의 고백처럼,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을 배우게 하신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척박하고 고통이 따르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 광야가 있기에 하나님만 볼 수 있는 믿음을 기르는 현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Yeshua Servants라는 기관에서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목회자 선교사들의 사정을 알고, 추천해 달라고 하셔서 몇 분들을 추천해서 작은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지난 주에 기적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16년에 우리 교회에서는 시무권사 두 분이 취임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기념으로 수건을 만들어 나누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잊었습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드렸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진행하시는 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후원을 부탁드렸던 한 분의 이름을 들으시고,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했더니 그 수건을 받으셨고 그 수건에 적혀진 교회이름과 두분의 권사님의 이름을 보면서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해 오셨노라고 반색을 하면서 그 형편을 들으시고 지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건 한 장의 나눔도 하나님은 허투루 받으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1-42).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수건 한 장을 나누었는데 그곳에 쓰인 이름을 기억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그 이름을 기억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수건 한 장으로 더 값진 보상을 주님은 마련해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어려움의 시기에 많은 사람이 필요를 호소합니다. 그 필요에 반응하여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요즘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셈을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으로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이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십니다. 진실하게 주님앞에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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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3
    아름다운교회 Feb 07.2021 처음부터 잘 배워야겠습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상황에서 목회의 패턴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비대면 예배도 그렇지만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직접 대면하기도 어려운 점도 있지만, 코로나에 감염되는 분들, 각종 사고로 인하여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돌보는 일이 그전처럼 일상적으로 되는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먼저는 목회자가 감염되지 않아야 성도들과 교회가 안전합니다. 최대한 조심하면서 일을 하고 다니기도 하고, 식당출입은 아예 금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성도들 심방은 직접 음식을 해서 나르는 필요를 느껴서 이것 저것도 시도를 해보면서 음식을 만들어 섬기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 일을 하다가 보니 자연적으로 음식하는 유튜브를 보게 되고, 주방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이 늘었습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음식을 하려니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하는 분들에게 들어보니 중요한 것이 칼입니다. 칼의 중요성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냥 썰면 되지 뭐 유별날까 싶었는데 일을 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칼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칼 값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또 이것 저것 유튜브를 둘러보니, 칼을 다루는 방법, 칼 가는 방법, 야채를 써는 방법 등등 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음식을 다루는 분들이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구나. 칼을 구하고, 다루고, 보관하는 것에서부터 그야말로 차근차근 하나씩 기초부터 잘 배워야 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전문가가 되는구나’라는 것을 정말 가슴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신앙생활은 어떨까요? 식당을 내는 음식전문가들도 기초에서부터 차근차근 실력과 배움을 통해서 전문가가 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에 비해서 우리들은 교회에 나와서 그냥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다가 세월을 보냅니다. 약간의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 집사도 되고, 권사도 장로도 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신앙생활의 전문가가 될까요? 그런 경우는 마치 봉사 문고리 잡는 것과 같아서 정말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에 의해서 변화도 되고, 성숙하게 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기초도 없이 ‘기복적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알지도 못하고 아는 척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초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예배 열심히 나오고, 헌금생활, 봉사 생활 잘하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칼을 고르는 방법에서, 다루는 방법, 칼 갈아 쓰는 방법, 보관하고 관리하는 방법 등 무수한 기초를 쌓듯이 그렇게 우리 신앙생활이 탄탄한 기초를 닦아 놓았을까요?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요? 음식 전문가만 되려고 해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데 심지어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한번 쯤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훈련의 과정이 없이 어쩌다가 벼락부자가 된 사람처럼, 은혜받아서 날뛰다가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경우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초가 튼튼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교회에 처음 발을 디뎌 놓았다면 그냥 교회만 다니지 말고,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기초부터 다져놓아야 합니다. 어쩌다 은혜받아 위대한 신앙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하나씩 기초를 다져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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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
    아름다운교회 Jan 31.2021 당신의 잠자리는 편하십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근래에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잠자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자고 난 이후에 느낌도 불편합니다. 그럴 이유야 있겠지만 오늘 새벽에 교회에 오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 자리가 편해야 하루가 힘이 나겠다는 것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무척 괴로운 일입니다. 한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을 못자면 성경 읽고 기도하면 되지…’ 그런데 잠을 못자 보니까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잠을 못 드는 고통도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고 나도 만족하거나 편안함이 없다면 그것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잠을 잤는데 그 느낌이 편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그만큼 하루가 편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내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영원한 잠, 영면(永眠)하게 될 때에 그때의 나의 잠 자리는 어떠할까?’ 그 영원한 잠, 죽음의 잠 자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지옥일 것이고, 편하다는 것은 천국일 것이 분명합니다. 현재의 삶에서 잠 자리가 불편해도 하루, 아니 삶이 불편해지는데 영원한 우리의 잠자리가 불편하다면 이것처럼 큰 불행이 어디에 있을까요?사람들은 하루의 편안한 잠 자리를 위하여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집이 있어야 합니다. 보통 값의 지불이 아닙니다. 수입의 1/3이상을 투자합니다. 침대가 편안해야합니다. 그래서 수천불의 값비싼 온갖 종류의 침대를 구입합니다. 그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분위기 또한 아늑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돈을 들여서 Decoration을 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그 관계가 나쁘면 아무리 편안하고 거대한 집도 한 순간에 지옥으로 돌변합니다. 그러니 이 행복한 잠자리 하나를 위하여 우리는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하고 평안한 잠자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냥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노력과 투자를 해서 평안한 잠자리를 만들었는데 얼마 살지 못하고 끝이 납니다. 그리 오래 누리지 못합니다. ‘아, 이제는 살만하다’ 싶으면 덜컥 질병이 찾아오고, 삶을 마무리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짧은 인생의 잠자리를 위하여 수많은 투자와 노력과 마음을 기울여 찾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영원한 잠을 자야 되는 잠자리는 그리 많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루의 잠자리가 불편하면 신경을 쓰이는데, 영원한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어찌 그냥 묵과하고 지나 갈 수 있을까요?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는 하나님의 말씀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잠자리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하루의 잠자리에 신경을 쓰면서 영원한 잠자리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 평안한 영원의 잠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나 교회 나온다고 예수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좁디 좁은 문, 제자의 길’을 걷지 않으면 멸망으로 인도된 문곁에 있다가 함께 멸망합니다. 여러분의 잠자리는 어떠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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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
    아름다운교회 Jan 24.2021 답을 알 수 없을 때
    우연한 기회에 제가 한국인 목회자인 것을 알게된 K라는 동아시안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세상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복음 전할 기회인지라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K라는 사람처럼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은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게 하느냐는 것일까요? 기업이 무너지고, 소상공인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기업과 가게들이 어려워지니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겪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업이 망했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교인감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에 따라서 자연히 재정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영적 흐름과 성도의 교제가 막힌지가 오래입니다. 어떤 교회는 문을 닫아야했고, 어떤 목회자는 교회로부터 해고를 통고 받기도 합니다. 한 두가지 고통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기에 자연히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28)는 말씀을 믿지만 그 선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과연 이러한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정말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찾기 위하여 정말 고통스러운 질문과 해답을 찾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코로나를 겪은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코로나는 제게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제 인생의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정말 나를 많이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라는 정말 견고한 믿음의 고백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ㅁ낳은 사람들은 그 목적과 답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요?어느 글에 이런 제안을 했는데 아주 묘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답이 아닌 것을 찾는다’ 비록 정답을 알 수 없지만, 왜라는 것에 대한 충분한 답을 줄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답이 아닌 것을 찾아서 그것을 피하면 답을 오해하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미워해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기 때문에” 등등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답을 피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답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신앙적 연단을 이루게 되는 유익함으로 답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라는 것들이 잡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망각하게 하는 요소를 제거하다가 보면, 어느 새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경륜(뜻)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고통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그리고 다시 이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죽도록 처절한 싸움을 싸우면서도 우리가 답을 찾지만 알지 못할 때, 적어도 우리는 답이 아닌 것을 비켜감으로써 정답에 조금 가까이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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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교회 Jan 17.2021 코로나 시대와 행.통 140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그저 예배하는 곳으로만 생각하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과 착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우리의 상식입니다. 교회를 예배 공동체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렸느냐 안드렸느냐, 대면 예배를 했느냐 비 대면 예배를 했느냐에 중점을 둡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되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 등등의 논쟁이 바로 교회를 예배 공동체로만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배는 호흡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에 의식하면서 호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의식이 된다면 그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호흡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에 호흡을 의식하면서 숨을 쉬는 것이지요.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자기가 일분에 몇 번 숨을 쉬는지, 산소량이 얼마인지 계산하지도 않고 그냥 생각없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냥 숨을 쉽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기본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숨쉬기 만큼이나 너무나 자연적이고 기본적인 것으로 당연히 예배를 해야만 하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이 전능자를 섬기는 길이 됩니다.교회가 예배공동체로만 남으면 무속적, 기복적 신앙으로 흐를 확률이 높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기본으로 하면서 가르치고 보여주고 살아내야 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나타내는 공동체’라고 하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예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내기 위하여 훈련, 양육(돌봄), 선교,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어우러져서 ‘전인격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하는 종합예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비입니다. 교회가 그저 예배 공동체로만 남으면 안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들이 잘못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렸느냐에 방점을 찍으면, “아, 나는 예배드렸어!(온라인이나 오프라인으로) 그러니 할 일을 다 했어”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마무리해 버립니다. 종합예술로서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connect’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지금은 성도의 교제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 잠깐이면, 이 바이러스 시대가 지나고 나면 옛날로 돌아갈건데 뭐 그리 조바심을 내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너진 생활pattern이 짧으면 그럴 수 있는데 이미 우리는 1년 가까이를 성도의 교제가 무너진 채로 살았고, 올 해도 그렇게 살 확률이 많으며, 내년에도 그 후유증을 앓으면 3년입니다. 이 시간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체질을 충분히 바꾸고도 남습니다. 그나마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관계가 단절되어가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젠 그 시계가 10년 이상은 더 빠르게 진전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행.통 140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하게 성도들을 귀찮게 하면서까지 보채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안착하지 않도록 깨우기 위함입니다. 흔들어 깨우고 싶습니다. 혼자 눈속에 있으면 그냥 죽습니다. 흔들어 뺨을 때리면서 깨라고 해야 합니다. 서로 연결고리를 다시 매야합니다 혼자 남지 마십시다. 영적으로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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